“곰이 사람으로 변하는데도 100일이면 되는데 10년째 변한 게 없네요.”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비정규직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기륭전자 비정규직노동자들이 투쟁한 지 10년이 흘렀다. 지난 22일 오전 민주노총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은 서울 신대방동 렉스엘이엔지(옛 기륭전자) 앞에서 비정규직 법 철폐를 위한 ‘오체투지’를 시작했다. 오체투지란 합장한 자세로 두 무릎을 꿇고 합장을 풀어 오른손으로 땅을 짚은 후 왼손과 이마를 같이 바닥에 대는 불교식 큰 절이다.

오체투지 3일차인 24일, 조합원들과 지지자들은 여의도에서 시작해 마포, 공덕을 지나 충정로까지 이동한다. 김소연 전 기륭전자분회장은 “한 시간에 1km정도 이동하는 것이 원래 계획”이라고 말했지만 예상보다 20분 정도 먼저 점심 식사 장소에 도착했다. 식당에 들어가서 이들은 바닥에 엎드리느라 까맣게 변해버린 하얀 소복을 벗기 시작했다. 소복 안에는 은박 깔개, 무릎과 팔꿈치 보호대 등 보호장비(?)가 단단히 갖춰져 있었다. 

   
▲ 오체투지 3일차인 24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지지자들은 여의도에서 시작해 마포, 공덕을 지나 충정로까지 이동한다. (사진 = 이치열 기자)
 

김 전 분회장은 “어제까지만 해도 옷이 다 젖어서 소복 안에 은박깔개를 덧대기로 했다”며 “무릎은 보호대를 해도 다 멍이 든다”고 말했다. 기륭전자 윤종희 조합원은 “삼보일배보다 오체투지 동작이 훨씬 더 힘들다”고 말했다. 

이들이 하얀 소복을 입고하는 투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8년 김 전 분회장이 94일 단식을 하는 등의 투쟁을 할 때도 입었다. 김 전 분회장은 “죽음을 각오한 단식 때처럼 목숨 걸고 오체투지에 나선다는 의미로 소복을 입었다”며 “목숨을 걸어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사회적 물음을 던지고 싶다”고 말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2005년 7월 노동조합을 결성한 이후 5년이 넘는 1895일의 투쟁이 이어졌다. 그 사이 조합원들은 다섯 번의 고공농성과 세 번의 단식을 이어갔다. 2008년 여름, 당시 분회장이던 김소연 전 분회장은 94일, 유흥희 현 분회장은 67일 단식하기도 했다. 그 결과 2010년 11월 1일 ‘정규직 직접 고용’ 합의를 이끌어냈다.

2년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2013년 5월 2일 조합원 10명이 회사로 돌아갔지만 회사는 이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다가 지난해 12월 30일 도둑이사를 했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은 이를 두고 “60~70년대나 들어봄직한 회사의 야반도주”라고 표현했다. 회사는 지난 2월 19일 상장 폐지했고, 지난 3월 17일에는 12억8851만원의 자본금을 6642만원으로 줄이는 감자를 진행했다. 

   
▲ 오체투지 3일차인 24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지지자들은 여의도에서 시작해 마포, 공덕을 지나 충정로까지 이동한다. (사진 = 이치열 기자)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10월 30일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10명이 기륭전자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에서 “밀린 임금 1692만 여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회사는 법원의 판결을 거부하고 다음날 항소했다. 

문재훈 소장은 비정규직을 “정리해고를 따라 온 노예 노동”이라며 “권리와 의무가 단절된 실질적인 노예제도”라고 표현했다. 그는 “비정규직은 수습기간을 영구화한 것에 불과하다”며 “불안이란 공포로 사람을 강박하여 스스로 노예의식을 심어 내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오체투지 행렬에 함께한 섬돌향린교회 임보라 목사는 “사업주에게 뒤통수를 맞아가며 한 오래된 싸움을 지지하기 위해” 거리에 나왔다. 이날 조합원 및 지지자들의 점심은 섬돌향린교회에서 지원했다. 윤종희 조합원은 “우리는 밥 먹으려고 오체투지 하는 것 같다”며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밥을 많이 먹지 못한다. 밥을 많이 먹으면 엎드리는 동작을 할 때 속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온 몸을 다 쓰기 때문에 오체투지를 하고 나면 온 몸이 아프다. 강하숙 조합원은 “6살짜리 딸이 나한테 ‘제일 아픈 곳 한군데만 말해보라’며 ‘거기 주물러주겠다’고 말했다”며 “아직 비정규직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가 그렇게 얘기할 때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유흥희 기륭전자 분회장은 “오체투지 첫 날 참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 분회장은 “교직원콜센터지부에서 어제 와주고 오늘도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동지들이 와서 힘이 난다”고 말했다.  

문재훈 소장은 오전 내내 북을 치며 오체투지 대열을 이끌었다. 오체투지에 참여한 10여명은 북을 한번 치면 걷기 시작하고 북을 한 번 더 치면 오체투지 절을 하고 한 번 더 치면 일어나는 방식으로 행진한다. 김 전 분회장은 “절하는 사람들은 땀이 나서 날씨가 좀 추워도 괜찮은데 플랜카드를 들고 같이 걷거나 유인물을 나눠주는 동지들이 더 힘들고 추울 것”이라며 걱정했다. 

시민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좋은 편이었다. 행렬을 바라보던 70대 정모씨는 “예전에 밥을 굶던 시절에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요즘은 더 살기 편해진 것 같은데도 빈부격차가 심해져서 이렇게 거리에 사람들이 나온다”며 “추운데 보기 안타깝다”고 말했다.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는 업무를 담당한 기륭전자 공동대책위원회 이정호씨는 “(오체투지가)기이한 광경이니까 시민들이 먼저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경우도 많고, 힘내라는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 오체투지 3일차인 24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지지자들은 여의도에서 시작해 마포, 공덕을 지나 충정로까지 이동한다. (사진 = 이치열 기자)
 

이들은 26일까지 오체투지를 진행해 청와대 앞까지 갈 계획이다. 오체투지에 참여한 송경동 시인은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조합원에게 동방박사 3명이 찾아오는 선물이 있다”며 “씨앤앰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이날 오후 5시 문화제에 목사님, 신부님, 영화 ‘카트’의 제작사 명필름 심재명 대표가 조합원들을 만나러 온다”고 말했다. 

열명의 조합원들은 ‘동지’다. 아이를 출산해 오체투지에 참여하지 못한 이미영 조합원은 아이를 안고 찾아왔다. 동지들을 보자 울음을 터뜨린 이 조합원은 “큰 아이가 곧 유치원에서 끝나기 때문에 한시간 뒤에 돌아가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기륭전자분회에서 유일한 남자인 이인섭 조합원은 “고생이라는 생각보다는 비정규직 투쟁의 모범이 되고 싶다”며 “비정규직 중 처음 투쟁을 시작한 만큼 동지들을 봐서라도 흔들리지 않아 이기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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