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실력은 위기 상황에서 나온다. 국정 최고 컨트롤타워인 청와대는 두 장짜리 ‘정윤회 동향’ 문건 하나에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문건 유출을 알고도 8개월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결과다. 사건이 불거진 이후 수습 과정도 낙제점 수준이다.”

16일자 모 언론사 1면 보도 내용이다. 모 언론사는 어디일까? 한겨레·경향이라고 지레짐작하기 쉽지만 정답은 동아일보다. 동아일보가 이날 ‘정윤회 스캔들’에 할애한 지면은 총 다섯 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를 때리고 있다. ‘대언론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언론의 야성은 점입가경이다. 주요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정윤회 스캔들을 보도하고 있는지 분석했다.

   

▲ ‘정윤회 스캔들’에 청와대가 휘청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윤회 씨, 박근혜 대통령, 박지만 EG회장. ⓒ연합뉴스

 

 

청와대 문건보도 ‘끝판왕’, 세계일보

‘정윤회 문건’은 세계일보의, 세계일보에 의한, 세계일보를 위한 보도였다. 세계일보는 이슈를 주도했다. 세계일보는 지난달 28일 청와대 내부 문건을 단독 입수해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작성한 ‘靑 비서실장 교체설 등 VIP측근(정윤회) 동향’ 보고서를 공개했다.

동아일보가 말했듯, 세계일보 보도 이후 청와대는 두 장짜리 문건에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집권 2년도 되지 않아 언론은 ‘레임덕’(권력누수 현상)을 말하고 있다. 

   
▲ 세계일보 지난달 28일자 보도.
 

세계일보는 지난 4월에도 청와대 내부 비위감찰 자료를 연속적으로 보도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범계 의원이 지난 15일 공개한 ‘BH(청와대) 문서 도난 후 세계일보 유출 관련 동향’을 보면, 세계일보 기자는 지난 3월 경찰 정보관으로부터 ‘청와대 직원 비위 관련 문서’를 받았는데 4월 보도는 이를 바탕으로 했다. 세계일보 기자는 이후 5월 128쪽에 이르는 소위 ‘박지만 EG 회장 관련 문건’을 추가로 입수했다. 취재원을 통한 자료 입수는 세계일보 보도를 뒷받침했다.

머뭇대다가도 ‘한방’있는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정윤회 스캔들’ 초반에는 문건 유출자 색출에 집중했다. 세계일보가 특종을 했던 다음 날(11월29일)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는 <라면박스 2개 靑문건 통째로 샜다>였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근무했던 박관천 경정이 외부로 청와대 문건을 무단 반출했다는 것이다. 

‘문건 유출 프레임’을 고수하던 조선일보가 실력을 발휘한 건 조응천 전 청와대 비서관과의 인터뷰 때부터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일 정윤회 문건을 ‘찌라시’로 치부했는데 “정윤회 문건의 신빙성은 60% 이상”이라고 말한 조 전 비서관과의 2일자 인터뷰는 청와대와 정윤회씨 주장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국면이 전환된 계기였다.

조선일보는 검찰 발 소식을 앞서 보도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되는 최경락 경위가 본격 언론에 알려진 시기는 지난 4일. 조선일보는 <崔·韓경위, 朴경정이 만든 문건 복사 유출 의혹>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일찌감치 핵심 인물로 지목된 박 경정에 대한 압수 수색은 예견됐지만 검찰 안팎에서 다소 이례적으로 여기는 압수 수색 장소가 바로 서울청 정보1분실에 근무하고 있는 최모 경위와 한모 경위의 집”이라며 두 경위를 문건 유출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최 경위가 유서에 “조선에서 문건 유출의 주범으로 몰고 가 너무 힘들게 됐다”고 적었을 정도로 조선일보의 검찰 발 보도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퇴진이 쇄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비판의 고삐를 놓지 않고 있으며,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이완구 원내대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향해 “아무리 ‘졸장부 시대’이지만 새누리당이 이들을 내세워 재집권하려고 들까 봐 식은땀이 날 정도다”(최보식 칼럼)라고 말하는 등 난사에 거침이 없다.

늦은 ‘참전’ 동아일보와 청와대에 선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소위 ‘물 먹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중앙일보가 지난 1일 비선 실세 의혹을 받고 있는 정씨를 인터뷰할 때 동아일보는 정씨 측근의 말을 전하는데 그쳤다.

   
▲ 동아일보 6일자 보도.
 

동아일보가 주목을 받았던 시점은 지난 6일이었다. 동아일보는 청와대 문건에서 검은색으로 가려진 부분에 이정현 당시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을 쫓아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고 보도했고, 8일에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시로 ‘정윤회 동향 문건’이 만들어졌다고 보도했다. 이에 반발한 김 실장은 동아일보 기자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후 동아일보는 청와대를 과녁 위에 올려놓았다. “문건 작성부터 유출, 보도까지 11개월 동안 청와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16일)며 ‘직무유기’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질타했다.

반면, 중앙일보는 비교적 청와대 입장에 선 보도를 해왔다. 지난 1일 해당 문건이 찌라시 수준이라는 정윤회씨 인터뷰를 1면에 실었고, 다음 날에는 박 대통령의 해명을 1면에서 전했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조 전 비서관 인터뷰로 박 대통령과 정씨는 거짓말을 한 꼴이 됐다.

검찰수사를 지켜보자는 중앙일보 역시 지난 8일자 사설에서는 그간의 논조를 바꾸며 “이번 사태로 국민적 신뢰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릴지 모를 살얼음판”, “임기가 절반 이상 남았는데도 레임덕까지 걱정해야 할 분위기”라고 우려를 표했다. 

실세의 실체 드러낸 한겨레

조중동의 논조가 다소 달라졌다지만, 여전히 ‘문건 유출은 국기문란’이라는 프레임은 견고하다. 이 프레임 위에서 검찰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국정을 농단했다는 사실보다 박관천 경정, 한 경위 등 유출자로 거론되는 일개 공무원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강조했다. 앞서 말한 언론들이 검찰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높다.

   
▲ 한겨레 3일자 보도.
 

한겨레는 정씨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이런 프레임을 깨고자 했다. 한겨레는 지난 3일 정씨와 관련된 문체부 국·과장을 박 대통령이 직접 교체 지시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정씨 부부가 승마 선수인 딸의 전국대회 및 국가대표 선발전 등을 둘러싸고 특혜 시비가 일자 청와대와 문체부 등을 통해 승마협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었다. 이 보도는 조선일보의 유진룡 전 문체부장관 인터뷰를 통해 사실이 입증됐고, 청와대는 박 대통령의 ‘인사 지시’를 인정했다. 

진보는 물론, 보수 언론에서조차 청와대의 인사 시스템을 비판하고 있는 지금, 민낯이 벗겨진 박 대통령과 언론의 격돌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검찰 수사 발표 이후 언론은 또 무엇을 보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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