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단독 보도로 촉발된 ‘정윤회 게이트’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청와대 문건을 ‘찌라시’로 치부한 박근혜 대통령과 그에 발맞춰 문건 유출 수사에 집중했던 검찰은 난관에 봉착했다. 문건 유출자로 지목받던 최경락(45) 서울지방경찰청 정보1분실 경위가 지난 13일 숨진 채로 발견됐고, 다음 날 공개된 그의 유서는 청와대의 개입을 시사했다.  

지상파를 제외한 대다수 신문은 16일 박근혜 대통령과 검찰을 겨냥했다. 전날 검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두한 박 대통령 친동생 박지만 EG회장도 함께 도마 위에 올랐다.

세계일보는 이날 <檢 “靑 제기 7인회 실체 없다” 결론>이라는 제하의 1면 보도에서 “검찰이 박 회장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7인회는 사실상 실체가 없는 것으로 결론 낸 것으로 알려졌다”고 밝혔다.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등이 연루된 ‘7인회’가 문건을 작성하고 일부러 유출해 핵심 참모진을 흔들고 있다는 청와대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 세계일보 16일치 보도.
 

세계일보는 또 최 경위 유족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사흘간 극심한 스트레스와 모욕감,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며 검찰의 수사가 무리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국민일보도 최 경위와 함께 ‘문건 유출자’로 지목받았던 서울지방경찰청 정보1분실 한모 경위의 부인을 인터뷰하며 검찰의 강압 수사 의혹을 제기했다. 한 경위 부인은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검찰이 나를 검찰청사로 불러 수갑 차고 포승줄에 묶인 남편과 ‘대질’하며 (청와대에서 유출된 문건) 원본이 있는 곳을 대라”고 밝혔다. 검찰의 강압 수사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보도다. 

이른바 ‘정윤회 파문 정국’에서 조선·중앙일보에 비해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동아일보는 청와대에 ‘돌직구’를 던졌다. 동아일보는 16일자 1면 톱뉴스 제목을 <8개월간 수수방관 ‘무대책 청와대’>로 뽑았다. “국정 최고 컨트롤타워인 청와대는 두 장짜리 ‘정윤회 동향’ 문건 하나에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문건 유출을 알고도 8개월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결과다. 사건이 불거진 이후 수습 과정도 낙제점 수준”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한 것.

동아일보는 6면 <‘국기문란’ 확인하고도 덮기 급급…나라 흔든 靑 직무유기>에서도 “박 대통령부터 국민의 시각에서 사안을 바라보는 위기대응의 ‘ABC’를 놓쳤다”며 “문건 유출 이후 청와대의 행태는 ‘헛발질’의 연속”이라고 수위 높은 비판을 했다. 

   
▲ 동아일보 16일치 보도.
 

조선일보 역시 같은 날 사설에서 “대통령들마다 직계 가족이 감옥에 가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박 대통령과 지만씨 모두 지금 나오고 있는 의혹들부터 말끔히 해소하고 주변을 철저히 다잡아야 한다”고 꼬집었고, 한겨레는 “비서 3인방에게 의존해온 비정상적이고 투명하지 못한 국정운영 방식을 고치라는 호소에 대통령은 여전히 귀를 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신문이 특종 경쟁을 통해 의제 설정을 주도했다면 지상파는 뉴스의 취사선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난 14일이 대표적이다. 이날은 최 경위 유족이 유서를 공개한 날이다. 지상파는 메인뉴스를 통해 일간지보다 관련 소식을 먼저 전할 수 있었는데 의제설정을 주도하지 못했다. 방송 뉴스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제목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날 KBS는 메인뉴스에서 <유서 일부 공개…“문건 유출과 무관”>으로, SBS는 <“유출 혐의 억울” 유서 공개>로 제목을 뽑았다. MBC 역시 제목이 <유서 공개…결백 주장>이었다. 그나마 KBS와 SBS는 뉴스 도입부에서 앵커멘트를 통해 청와대의 회유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MBC 앵커멘트에는 관련 내용이 없었다.      

   
▲ KBS, MBC 14일자 메인뉴스.
 

지상파 한 기자는 “방송 뉴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뉴스의 제목”이라며 “청와대 회유 가능성을 시사하는 내용을 다루면서도 제목이 다소 밋밋한 것은 권력 눈치를 보고 민감한 내용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큰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유서 공개는) 시기상으로 (주요일간지에 앞서) 의제 설정을 할 수 있는 시간대였다”며 “이슈를 주도할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비판했다.

MBC는 전날 리포트에서도 검찰의 입장을 제목(“유감…수사엔 차질 없을 것”)으로 뽑으며 “문건이 외부로 유포되는 과정에 최 경위가 연루됐다는 물증이 이미 확보돼있어 수사에는 큰 차질이 없다”고 보도했다. KBS와 SBS가 최 경위의 죽음으로 향후 검찰 수사가 난관에 봉착했음을 알렸지만, MBC는 검찰의 입장만 전하기 바빴던 것이다.

지상파의 이런 보도는 신문뿐 아니라 종편 채널 JTBC와 비교해서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JTBC는 지난 15일 단독 보도 <“민정수석실 관계자 만났다”>를 통해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회유가 있었다’고 말한 한 경위를 직접 인터뷰했다.

   
▲ JTBC 15일자 보도.
 

JTBC는 “한 경위는 JTBC 취재진과의 전화 통화에서 ‘지난 8일 청와대 민정수석실 관계자가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해 둘이 만난 일이 있다’고 밝혔다”며 “그는 민정수석실 직원이 자신에게 ‘자백을 해라. 그러면 기소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는 다음 날 경향신문, 국민일보, 세계일보 등 주요 일간지들이 인용했을 만큼 파장이 컸다. 

권력 눈치보기를 넘어 지상파의 취재 역량이 퇴보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기획국장은 “‘정윤회 문건’과 관련해 지상파는 사건 자체를 검찰 혹은 청와대 시각에서만 보고 있다”며 “권위주의 정부의 언론장악 이후에 누적된 경험치가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국장은 “전반적으로 지상파 보도국의 취재력이 퇴보한 것 같다”며 “새로운 사실 발굴에 대한 욕구가 떨어진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민감한 이슈를 지속적으로 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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