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를 읽었던 2010년의 대학생들은 4년 뒤 드라마 ‘미생’을 보는 직장인이 됐다. 지난 7일, 7회 방송에서 평균 시청률 5%대를 넘기며 최고 기록을 세운 드라마 미생의 인기 비결은 뭘까? 물론 누적 판매 100만 부를 넘은 원작 웹툰 ‘미생’(윤태호 작가) 훌륭함 덕도 있다. 하지만 뛰어난 원작에 버금가는 후속작을 만들기 힘든 만큼 드라마 ‘미생’은 노동에 파묻혀 사는 대중과 충분히 소통하는 지점이 따로 있다.  

   
▲ 드라마 '미생' 화면 갈무리.
 

힐링의 대표서적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한마디로 ‘20대는 당장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하는 상품성이 떨어져도 괜찮다’는 위로였다. 저자인 김 교수는 “기적이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연습은 많은 ‘오늘’이 모여서 만들어진다”와 같은 말을 통해 청춘들의 방황을 안심시켰다. 취업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내일’이 이끄는 삶이 아닌 ‘내 일’이 이끄는 삶을 살라며 스펙이 아닌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라고 조언했다. 

기적은 천천히 이뤄질까? 바둑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느리지만 성실하게 노력했던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임시완 분)는 프로기사 입단이 좌절된다. 원인터내셔널에 인턴이 된 장그래는 바둑이라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스토리가 있다. 하지만 장그래는 26살이 되도록 스펙하나 없이 뭐했느냐는 질문이나 일주일이나 늦게 낙하산으로 입사해 인턴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뿐이다. 그런 장그래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최전선에 있는 무역회사의 내부를 살펴본다.     

인턴 사원 장그래는 회사에서 이방인이다. 회사에 융화되지 못하고, 일당백을 요구하는 눈치게임 속에서도 굼뜨기 짝이 없다. 인턴 기간을 거쳐 계약직 사원을 넘어 정규직 사원까지 가는 길이 험난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장그래 뿐 아니라 모든 직원의 목표는 생존이다. 최고급 노예로 인턴에 선발된 안영이(강소라 분)가 드라마 초반에 물건을 팔기 위해 기꺼이 자신이 보정 속옷을 직접 착용하며 바이어를 설득하는 과정이 나온다.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자본주의를 정의했던 마르크스의 지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드라마 '미생' 화면 갈무리.
 

미생은 자신을 팔아 기꺼이 노예가 되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아름답게 그린다. 웹툰에서는 사용하지 못했던 음악도 적절히 사용한다. 사원들이 무역 관련 전문용어를 써가며 정신없이 일하는 모습이나 야근을 하면서 피로를 쫓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나올 땐 어김없이 밝은 노래가 배경으로 깔리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청춘을 상대로 한 힐링 강연에서 강연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고난을 극복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때 울컥하게 만드는 배경음악을 사용한 것과 같은 느낌이다. 장그래에게 공감하는 많은 직장인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낭만적인 메시지일 뿐이다. 그리고 장그래처럼 자기 착취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임시완 분). 자료 = 드라마 '미생' 공식 홈페이지
 

“비천한 인민에게 즐거움을 고결하게 향유할 능력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압제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하나의 명예로 생각한다.” 

프랑스 철학자 ‘라 보에티’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유와 복종 사이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지만 대부분 노예 처지를 선택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자유를 열망하지만 자유 획득을 위해 싸우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유를 꿈 꿀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장그래에게 원인터내셔널은 일당백을 요구하는 부담스러운 회사지만 쫓겨나면 갈 곳 없는 막다른 공간이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억압은커녕 조직의 폭력성을 지적하지 않는 대신 미생은 회사에서 느끼는 절망감을 보여줘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낸다. 그리고 폭력을 잘 견뎌낸 자들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2014년 현재, ‘조금 아파도 괜찮다’는 메시지는 이제 힐링이 아니다. 새로운 힐링은 ‘나 아픈데 너도 아프냐’다.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싫으면서도 일을 잘하고 싶은 찌질이(?)를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후 4년 동안 우리사회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마저 놓아버릴 만큼 지쳤다는 의미다. 

드라마에서 장그래는 직장 상사나 인턴 동료들이 하는 자신을 무시하는 뒷담화를 자주 듣게 된다. 웹툰 원작보다 극적인 요소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비현실적인 장면이지만 비극은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 판타지를 도입했던 기존 드라마와 달리 미생은 현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비현실적인 설정을 사용한다. 원인진단도 해결책도 희망도 없이 현실의 냉혹함만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는 드라마 미생의 한계가 곧 인기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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