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창간 94년을 맞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전체 지면을 분석한 책이 각각 5권으로 출간됐습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제강점기, 4·19혁명부터 1987년 민주화운동까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주요 사건을 어떻게 기록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에 각 책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조선·동아 94년 지면 대해부 “반민족·반민중·반민주 언론”>
             <조선일보가 윤봉길 의사를 ‘이봉길’로 오기한 이유>

조선일보는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지’로 전락했지만 해방 후에는 김구 선생의 노선을 지지했다. 1945년 11월 24일 사설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혁명 지사 김구 선생을 맞이하여 이 땅의 역사가 바르고 정당하게 결실되기를 바라며…”라고 했다. 이때만 해도 김구 선생만 ‘혁명지사’였지만 조선일보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갑자기 “이 박사는 구국혁명의 노투사”라고 칭호했다.  

김구 선생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도 반대했지만 이후 찬성으로 돌아선다. 조선일보는 “문제는 오직 자립에 있고 자립은 오직 민족통일에 있음을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외치는 바”라고 했다. 하지만 1948년 1월10일자 사설에선 김구 선생의 노선을 “이상론”이라고 규정했다.  

<조선일보 대해부>는 조선일보의 갈지자 행보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조선일보는 1945년 11월 25일 복간된 직후부터 ‘우리의 위대한 혁명지사’ ‘민족 위해 수화 불사’ ‘혈의 투쟁을 일관’ ‘인정과 의지의 투자’ 등 최대의 찬사를 김구에게 바쳐왔다. 특히 방응모는 ‘김구 영웅화’에 앞장섰다. 그러나 방응모는 김구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의 단독정부론과 ‘유엔 감시 하의 남북 동시 선거’를 반대하고 나서자 위의 글에서 그를 ‘이상론자’ ‘몽상가’ ‘현실을 도외시하는 모험론자’로 몰아붙였다.”

친일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출범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는 “국가민족을 해한 적의 주구배를 숙청할 것은 국가적 역사적 강기의 확립을 뜻하는 건국의 기본정신”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고문으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을 잡아들인 반민특위 조사관들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한 사건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고 무장경찰대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한 일에 대해서도 1면에서 3단 기사로 다룰 뿐이었다. 

왜곡보도로 인한 피해도 극심했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 제주도민들을 공산당 세력으로 규정하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제주 4·3사건) 그리고 전남 여수에 주둔중인 국방경비대 제14연대는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선일보는 여수·순천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은 채 반란군의 학살에만 초점을 맞췄다. 조선일보는 “지난 20일 여수에서 국군 반란이 일어났단 보도를 듣고 우리가 제일 염려한 것은 인명의 실상과 시설의 파괴에 대한 것”이라고 전했다. 

<조선일보 대해부>는 “여순사건 이래 60년이 넘게 많은 전문가들이 조사하고 연구해서 발표한 자료들이나 외국인 기자의 보도를 보면 반란군과 동조자들의 살육이나 ‘인민재판’에 비해 진압군의 ‘학살’과 인권유린이 훨씬 더 가혹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이 폭파한 한강다리.
 

한국전쟁 시기에도 조선일보의 왜곡보도는 극에 달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수도를 사수하겠다’는 방송을 하면서 국민 몰래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갈 만큼 초기 전세는 남쪽에 불리했다. 

이런 전세는 조선일보도 알고 있었다. 조선일보가 발간한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는 “전쟁이 터진 25일 조선일보 사원들은 사장실에 모였다. 전방에 나갔다 온 기자들은 ‘전황이 매우 불리하다’며 비관적인 전망을 보고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전과 혁혁·요격 태세 완비/국군 일부 해주 돌입/적 사살 180명/전차 등 격파 58대>기사를 1면에 대서특필했을 뿐 자신들이 알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았다.  

고급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얼어 죽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한 국민방위군사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국군이 북한 인민군과 빨치산과 내통한다는 혐의를 씌워 무고한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 거창학살사건에 반발해 이시영 부통령이 사표를 제출한 사건을 전하면서도 그 이유는 전하지 않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반민주적 행위도 또한 보도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회에 제출한 직선제 개헌안이 압도적 반대로 부결되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구속시켰으나(부산정치파동) 조선일보는 이승만 정권의 정치 공작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 '이승만 대통령 하야해라'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도 마찬가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3선 제한을 철폐하기 위해 개헌안을 냈으나 헌법 개정에 필요한 136표를 얻지 못했다. 정족수의 3분의 2가 찬성해야 통과되는데 당시 찬성표는 135표로 정족수 203명의 3분의2(135.333…)를 넘지 못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사사오입’ 논리를 내세워 통과시켰지만 조선일보는 침묵을 지켰다. 

 

 

낯설다, 잠깐이나마 독재를 비판했던 조선일보
4·19 혁명 땐 독재 타도 외치다 5·16 이후 다시 정권 나팔수로

1960년은 조선일보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시기였다. 이승만 독재 정권의 나팔수를 자처했던 조선일보가 부정선거를 계기로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하더니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고 독재 정권 타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언제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독재 정권의 나팔수가 된다.

1960년 3·15 부정선거는 그야말로 최악의 부정선거였다.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가 2월28일 일요일 대구에서 유세하기로 하자 집권여당인 자유당은 대구 고등학생들을 일요일날 등교시키라는 황당한 지시를 내려보냈다. 민주당 유세장이 가지 못 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혁명이 도화선이 된 대구 고교생들의 2·28 데모 사건이 일어난 이유다. 

조선일보는 대구 고교생들의 데모는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지만 3월3일부터 정권의 부정선거 움직임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자유당의 부정선거 비밀지령문을 비판하며 <선거라는 이름의 살상극을 탄함>,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유권자의 용기를 촉구한다> 등의 사설을 연달아 실었다.

3월 15일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항쟁이 일어나자 17일 1면에 “민주주의의 골격이 될 ‘선거’라는 제도가 이렇게도 처절하고 그다지도 황량하다면 민주주의를 위해서 뿌린 동서고금의 선각자들의 혈의 분투와 노고가 너무나 가엽지 않을까”라는 사설을 실었다. 

4월11일,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 죽어 있는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자 이승만 정권을 향한 조선일보의 논조는 더욱 강경해졌다. 12일부터 19일까지 <정부는 아직도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김주열 군의 사인과 최루탄의 출처를 밝히라> 등의 사설을 실었다. “어째서 마산시민들이 그토록 생사 결단의 항쟁에 총궐기하였으며…정부 당국은 엄숙한 자가비판이 있어야 하겠다.”혁 명의 열기가 마산에서 전국 각지로 퍼진 4월19일, 고려대를 시작으로 서울대, 연세대, 동국대, 성균관대 등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조선일보의 이날 석간 1면 머리기사는 <전 대학생이 총궐기/열띤 데모의 홍수 장안을 휩쓸다>이었다. 이날 조간과 석간은 모두 데모 기사로 도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26일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 제목은 <만세! 민권은 이겼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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