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창간 94년을 맞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전체 지면을 분석한 책이 각각 5권으로 출간됐습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제강점기, 4·19혁명부터 1987년 민주화운동까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주요 사건을 어떻게 기록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에 각 책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도 ‘의거’로 평가되지만 당시 중국 장개석 총통도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이 의거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조선일보는 며칠 뒤인 5월8일자 2면 기사 에서 “범인 윤봉길의 자백에 의하면 직접 흉행을 명령한 것은 조선 OO당부의 이춘산인 것이 판명…이춘산은 소비에트 로서아(러시아)의 명령에 따라 하르빈(하얼빈)에서 적화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사건 배후에는 적로의 손이 간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전했다. 이어 “그(윤봉길)의 배후에 조선공산당의 마수가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고 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윤봉길 의사는 소련과 조선공산당의 공작에 의해 일본군과 관료들에게 폭탄을 던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매우 다른 내용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윤봉길 의사는 ‘장부출가생불환 (丈夫出家生不還: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4월29일 거사를 준비하게 됐다. 윤봉길 의사는 공산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 윤봉길 의사

 

 

조선일보는 윤봉길 의사의 이름을 이봉길로 표기하는 황당한 오보도 냈다. 1933년 9월4일자 기사 <이봉길OO 30명 만주 일대에 잠입활동>에서 “작년 4월29일 상해에서 백천(白川:시라카와) 대장에게 폭탄을 던져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조선OO당 이봉길 일파의 잔당은 그 후에도 암중활약을 계속하여…”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대해부>는 “당시 조선일보 기자들이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얼마나 무관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은 사건”이라며 “이 기사는 윤 의사가 일파를 거느렸다고 썼지만 윤 의사는 일파를 거느릴만한 시간도 자금도 없었다. 전형적인 과장 왜곡 기사”라고 지적했다.  

이 책은 사회주의적 성향을 띤 기자들로 한때 ‘민족지’로 이름을 높였던 조선일보가 어떻게 친일지로 변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윤봉길 의사 기사는 조선일보의 친일 성향을 보여주는 여러 사례 중의 하나다. 

조선일보는 한때나마 분명 민족지였다. 1920년 3월 5일 창간 초기부터 반일 논조로 조선 총독부로부터 자주 압수당했다. 1920년 6월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등>이란 연속 기획물을 내면서 “왜놈”, “총과 칼로써 조선민족을 죽이려 한다”고 일제를 비판했다. 

또한 <자연의 화>라는 사설에서 일제 경찰을 강하게 비판하자 총독부는 1주 정간 조치했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철두철미 배일신문다운 소질을 발휘하지” 못했다며 오히려 반성문을 썼다. 적극적으로 배일 논조를 펼쳤다면 폐간 당했을 건데 1주 정간에 그쳤다는 것이다.  

‘정미7적’인 친일파 송병준이 인수하고도 조선일보는 민족지로 활약했다. 1922년에는 총독 퇴진을 요구하는 논설을 실었고, 1924년 9월에는 일본 경찰이 조선인 28명을 학살한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사원들은 일제의 언론탄압에 맞선 ‘전조선기자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좌우세력이 힘을 모아 만든 항일단체 신간회 설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
 

하지만 1928년 무기정간 이후 조선일보 논조는 서서히 바뀌어 방응모가 인수한 후에는 친일보도가 노골화된다. 방일문화재단은 책 <계초 방응모>에서 “한민족의 암울했던 시절에 방응모라는 사람은 광복이라는 또 다른 금맥을 캐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투척했던 셈”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에서는 “조선일보 지면의 변화와 함께 방응모도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활동에 나섰다”고 전혀 다른 평가를 내렸다. 

방응모의 조선일보가 독립운동과 일제를 어떻게 보도했는지 살펴보자. 1933년 일본 황태자(일왕 아키히토)의 탄생을 축하하는 사설을 싣고, 일왕을 ‘대원수 폐하’라고 호칭했던 건 예사다. 1936년에는 새해 첫날에 나온 신문 머리기사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의 연두사를 처음으로 올렸다. 이 연두사에서 우가키 총독은 을사늑약을 ‘시정(始政)’이라고 했다. 

그해 8월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총독부로부터 폐간 당했지만 조선일보는 외면했다. 오히려 “이러한 비국민적 태도에 대하여는 장래에도 엄중 조치를 가할 방침인데 일반도 과오가 없도록 주의”하라는 총독부 관리의 말을 인용해 보도할 뿐이었다.

조선일보는 8월 12일부터 대일본제국을 위한 국방헌금을 모은다는 ‘사고’를 내기 시작했고,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해서도 “지나(중국)의 오만불손, 항일불신의 도전적 태도는…중남지에 있어서는 상해사변을 유발한 결과로…전국적 전지적 사변으로 돌변하고 말았다”고 전했다. 침략이 중국 탓이라는 얘기다. 

   
▲ 조선일보 1936년 1월1일자 1면
 

일본군이 고전하자 조선일보는 1면에 <어성려 봉안의 길>이란 사설을 싣는다. “각자 그 본분에 의하며 시난(時難) 극복에 매진하는 것이 어성려 봉안의 최대 유일의 길인 것을 일반 국민은 명심할 것.” 침략전쟁에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조선지원병제도에 대해서도 “조선민중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던 병역의무의 제1단계를 실현케 하는 것”이라고 옹호했다. 

조선일보의 친일 논조는 이어 2차 세계대전마저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일보는 기사 <독파 전단 개시/구주대전은 불가피>에서 “세계대전은 제국(일제)의 일대 비약의 호기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폐간 당한 1940년에도 조선일보는 변함 없었다. 1월1일 석간에 일왕 히로히토 부부에 관한 기사가 1면 머리를 차지했고 기사 옆에 일장기를 배치했다. 그럼에도 그해 총독부에 의해 폐간됐지만 “최근 정세로 오 조선일보는 신문 통제의 국책에 의하여 금 (8월)10일로써 폐간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밝힐 뿐이었다. 1920년 1주 정간 조치에 대해 반발했던 조선일보 사설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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