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망국(亡國)에 이르고 기억은 구원의 비결이다.”

이스라엘 ‘야드 바셈’(Yad Vashem) 홀로코스트 기념관 동판에 새겨진 글귀다. 끊임없는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동시에 기록된 역사의 영속성을 되새기게 한다. 진실 추구라는 언론 사명이 위태로운 지금, 우리가 과거의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40년 전 펜을 든 반란자들이 있었다. 유신독재 체제에 저항하며 민중을 대변하려 한 소수의 투쟁이 있었다. 그들은 언론자유에 몸을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자유언론실천선언’이다. 선언의 실천은 위대했으나 시대는 실천의 완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듬해 해직됐다. 

오는 24일은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한 지 꼭 40년이 되는 날이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20일 고(故) 성유보 선생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최전방에서 박정희 유신독재와 맞선 이부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을 서울 광화문,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 동아일보 기자 출신 이부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사진= 김도연 기자)
 

그는 지난 16일 재심 무죄판결을 통해 ‘청우회(靑友會)’라는 반국가단체를 만들었다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를 벗었다. 39년 만이다. 이달 초 별세한 성유보 선생도 함께였다. 이 고문은 “성유보가 떠난 지 일주일 만에 무죄가 나왔다”며 “무죄라는 얘기나 듣고 가지 뭘 그리 급했을까”라고 성유보 선생 별세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청우회 사건에 연루된 이창홍, 성유보, 정정봉 그리고 나. 이 가운데 이창홍과 성유보는 세상을 떠났다. 정정봉씨는 고문후유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이런 상태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니 몹시 응어리가 남는다. 70세가 넘었다. 이제 와 우리가 이루고자 했던 것을 돌아보면 아쉬움 같은 것들이 있다. 시대가 전진을 못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아버지 족쇄를 털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잖나. 그런 게 질곡으로 나타나고 있다.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아직까지도 냉전 색깔론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

39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청우회 사건은 동아일보 기자들이 해직된 직후인 1975년 6월 일어났다. 이번 판결에서 알 수 있듯, 용공조작 사건이었다. 이부영, 성유보, 정정봉 등이 반국가단체 ‘청우회’를 조직해 자유언론운동을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게 당시 권력의 논리였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박정희 독재정권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박정희 정권은 모든 민주화‧통일 운동을 색깔론으로 대응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운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외압으로 동아일보 광고가 끊겼다. 자유언론 선언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 기사가 생생하게 전달됐으니까.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와 그곳을 자발적으로 채운 시민들의 격려 광고는 전 세계 언론이 주목한 사건이었다. 독재권력은 ‘청우회 사건’으로 자유언론운동을 붉게 색칠했다. 정당한 싸움이 곡해되는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다.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 故 성유보 전 동아투위 위원장. (사진 = 이치열 기자)
 

“73년까지 동아방송 뉴스부 기자였던 이창홍씨는 민청학련 사건 핵심 인사, 후배 이현배 등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수배를 당했다. 인혁당, 민청학련 후배들에게 사형, 무기징역이 내려질 때, 그 공포에 짓눌렸는지 이창홍씨는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가 갑자기 74년 연말께 중앙정보부에 자진해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선 자신이 민청학련이 아닌 동아자유언론운동에 관여했다는 식으로 정보부에 진술했단다. 친목모임 ‘청우회’가 매개가 된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이창홍씨가 정신분열증에 걸렸다며 ‘청우회 사건’에 공소조차 하지 않았다.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언론은 이들이 청우회를 통해 국가를 전복하려 한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이 과정에서 동아투위 위원 수십 명이 참고인으로 불려가 조사를 당하기도 했다.

“성유보, 정정봉과 함께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자백을 강요했다. 나는 1심에서 18년 구형에 9년 징역을 선고 받았고, 두 사람은 8년 구형에 4년 징역형을 받았다. 2심에서는 2년6월로 줄었다. 정정봉은 1년6월, 성유보는 1년을 받았다. 박정희 독재정권 입장에서 보면, 동아백지광고 사태 등을 공산주의자들이 준동했다고 낙인찍는 데 청우회 건보다 좋은 게 있었겠나. 언론은 사실을 왜곡하기 바빴다. 그래도 동아투위 위원들은 꿋꿋하게 성원해줬다. 동료들을 고생시켜 참 미안했다.”

성유보 선생 역시 ‘청우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다. 그는 지난 3월 한겨레에서 연재한 ‘길을 찾아서’를 통해 야만의 시대를 증언했다. 이 기고는 그가 언론에 남긴 마지막 기록이다.

“그들은 구금 나흘째 되는 날 ‘청우회의 강령과 규약’이란 문건을 들고 와 ‘너희들, 이 나라에 모택동식 공산주의를 만들려고 청우회를 만든 것이지?’라고 다그쳤다. ‘이부영과 정정봉이 썼다’는 자술서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부인했다. 그들의 자술서 내용이 전혀 사실이 아니었을뿐더러, 나는 모택동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닷새 동안 버텼다. 그들은 주로 야간에 2~3차례에 걸쳐 야전침대의 네모진 각목으로 엉덩이와 종아리를 장작 패듯 두들겼다. 몽둥이찜질 사흘째가 되자 온통 피멍이 들었고, 그 위에 다시 매질을 해서 쓰리고 아프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매질 고문 닷새 만에 나는 항복했다. 다른 친구들이 썼다는 자술서를 거의 그대로 베꼈다. 그렇게 나는 ‘모택동주의자’가 됐다.”

   
▲ 지난 11일 성유보 전 동아투위 위원장 노제가 옛 동아일보 사옥인 현 일민미술관 앞에서 열렸다. (사진=연합뉴스)
 

‘언론자유’를 입 밖으로 꺼내기만 해도 끌려가 고문을 당하던 엄혹한 시절, 한국 기자들은 유신체제 규탄 시위를 하는 학생들이 군홧발에 짓이겨져도 바라만 봐야 했다. 기록하지 않는 언론과 그에 절규하는 민중. 수십 년이 흘렀지만 시대는 묘하게 닮았다. 세월호 유가족의 절박한 호소에 눈길 주지 않는 언론, 사회 약자가 아닌 자본을 대변하는 언론, 이제는 스스로 권력이 된 언론. 또 다른 야만 시대, 이부영이 바라보는 현재 언론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 시대는, 비유를 하면 구멍가게, 소자영업자 시대였다. 변호사, 대학교수, 문화예술인 등 지식인들이 우직하게 분노를 할 줄 알았던 시대였다. 자본 지배력이 사회 속으로 깊게 침투하지 못했다. 정의라는 것에 갈증이 높았다. 불이익을 감수해서라도 나섰다. 지금 언론은 지배 권력 일부로 포섭되지 않았다. 스스로 권력화하려 애쓰잖나.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언론이 중요한 이유다.”

“언론 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케 하는 자유다. 난 그걸 절감한다. 언론자유는 신문, 방송에만 종사하는 사람만 누리는 자유가 아니다. 40년 동안 동아투위 동료들이 희생을 하면서 왜 자유언론 깃발을 지켰을까? 우리 권익을 위해서 지켜온 게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평화 공존과 평화 통일 길을 열고자 했던 선대 뜻을 후대에 전달하는 통로, 그것이 언론자유다. 냉전 상흔을 치유하고 하나의 역사로 만드는 일, 그 과업에 가장 중요한 가치가 언론자유다. 여전히 시대 소명을 느끼기 때문에 동아투위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 1975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이부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지난 20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김도연 기자)
 

동아일보 해직언론인들은 40년이 지났지만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순간’을 기억한다. 또 후배 언론인들도 제 나름 그들의 저항 정신을 ‘망각’하지 않으려 한다. 스스로 구원하고자. 언론이 질식해가는 시대, 그래도 언론자유를 위해 단내가 날 정도로 발로 뛰는 기자와 매체들이 있다. <뉴스타파>와 같은 자본으로 독립된 언론도 등장했다. 이 고문에게 그들에 대한 격려를 부탁했다. 그는 해직 언론인에 대해 애정 어린 조언도 빠뜨리지 않았다. 

“최근 동아투위 위원들과 후배 언론인들이 함께 자유언론실천재단을 만들었다. 자유언론 정신을 이어갈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우리 시대는 굉장히 야만적인 시대였다. 정보부가 나서서 동아일보 출신 기자의 취업을 막았을 정도였으니까. 직장을 잡아도 얼마 되지 않아 잘리기 일쑤였다. 요새는 권력이 그때보다 더 교활해진 것 같다. 우리 못지 않게 힘들지 않을까 싶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을 포함한 각종 언론 기구들이 제 역할을 하면서 버텨준다면, YTN, MBC 등 해직언론인을 현직 동료들이 끝까지 보호해준다면, 어려운 시기 잘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현직에 있는 동료들이 부담되더라도 해직 언론인을 뒷받침해야 한다. ‘내가 해직이 되더라도 끝까지 지지해주는 동지가 있다’는 믿음이 곧 힘이다. 출판물과 신문·방송 등을 통해 투쟁 소식을 꾸준히 전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시대는 다시 나아갈 것이다.”

아래 링크는 비영리 독립언론 <뉴스타파>가 만든 자유언론실천선언 4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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