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①) 39년전 성유보 기자가 동료들과 함께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가 해직되어 결국 복직하지 못한 한이 서린 동아일보 옛 사옥 (현 일민미술관) 앞에 장례행렬이 멈춰섰다. 사진=이치열 기자
 
   
▲ 사진 ②) 고 성유보 선생의 장례 절차에 호상을 맡은 이부영 상임고문(왼쪽)과 신홍범 전 조선투위 위원장이 인사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큰 별이 졌다. 성유보 선생이 별세했다. 언론계는 비통에 잠겼다. 고인은 지난 8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영면했다. 평생 자유언론과 평화통일 운동에 앞장을 섰던 그였다. 고인의 장례는 ‘민주·통일 이룰태림 참언론인 고 성유보 선생 민주사회장’이라는 이름으로 지난주 서울광장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 (사진③,④)

   
▲ 사진 ③) 사진=이치열 기자
 
   
▲ 사진 ④) 사진=이치열 기자
 

고인의 장남 성덕무 씨는 이렇게 말했다. “3박 4일 동안 상을 치르며 참 많은 ‘성유보’를 만났다. 언론인 성유보, 민주주의 사상가 성유보, 평화통일운동가 성유보도 있었다. 후회하는 게 있다. 이 나이 되도록 아버지를 한 번도 뜨겁게 안아보지 못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성유보를 만난다면 뜨거운 포옹을 해주길 바란다.”

   
▲ 사진 ⑤) 사진=이치열 기자
 

남겨진 자들은 각자의 ‘성유보’를 가슴에 아로새겼다. 함세웅 신부(사진⑤)는 “선생은 늘 우리 사제들에게 ‘역사적으로 빚을 졌다’고 했다”며 “그러나 우리야말로 선생에게 역사의 빚을 졌다”고 전했다. 함 신부는 “민주화와 인권을 향한 선생의 뜻을 기리며 살 것”이라고 했다. 권오훈 언론노조 KBS본부장은 “이제 후배 언론인들이 성유보가 되겠다”며 “아직도 세상은 선생을 필요로 하는데 너무 일찍 떠나셨다”고 애도했다. 그는 “이제 후배들이 선생에게 진 빚 갚겠다”며 “다시 언론자유, 민주언론의 깃발 들겠다”고 밝혔다.

   
▲ 사진 ⑥) 한겨레신문사에서 노제가 끝난 후 유가족들은 영정사진을 들고, 고인이 초대 편집위원장을 지냈던 한겨레 편집국을 한바퀴 둘러봤다. 사진=금준경 기자
 

고인은 언론 민주화운동의 역사 자체다. 고인은 언론자유 투쟁을 상징하는, 1974년 10월 ‘동아자유언론실천선언’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전두환 신군부 집권기에도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전신 민주언론운동협의회(1984년) 초대 사무국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19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을 맡으며 언론시민운동의 길을 걸었다.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은 “참으로 비통하다”며 “고인은 박정희 정권 때 이부영 선생과 함께 투옥되어 온갖 고문을 당했다. 그때의 고문이 훗날의 병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밝혔다. 이부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은 “고인과는 54년 친구”라며 “70세가 넘으니 누가 먼저 가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됐지만 그래도 몸 반쪽이 떨어져나간 느낌”이라고 말했다.

   
▲ 사진 ⑦)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하기 전에 가족과 지인들이 고인을 마지막으로 떠내보내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고인이 평생 내세웠던 언론자유와 독립의 기치는 여전히 과제다. 이명박 정부 5년과 박근혜 정부의 임기 중반부를 통과하고 있는 현재, 언론은 길을 잃었다. 공영방송은 친정부 성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부 보수언론은 자본에 포섭된 채 호도와 왜곡을 일삼는다. “민주주의 사회의 언론은 사물을 독재 권력의 눈이 아닌, 대자본의 눈이 아닌, 국민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고인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사무치는 이유다.

   
▲ 사진 ⑧)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이 끝난 후, 만장행렬이 동아일보 사옥 앞으로 행진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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