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8시 20분, 일요일 오전이지만 서울 지하철 2호선 양천구청역에서는 20~30대 청년들이 줄지어 나오며 인도를 가득 메웠다. 서둘러 이동해야했다. 이들은 이날 오전에 삼성그룹 채용을 위한 첫 관문인 삼성직무적성검사(SSAT, SamSung Aptitude Test) 시험을 보는 취업준비생(취준생)들이다. 8시 30분까지 입실이라 삼성전자 지원자들의 고사장인 서울 양천구 목동고등학교 주변은 북새통이었다.

지하철에서부터 SSAT 모의고사 문제집을 보던 이들을 따라가면 시험장소인 목동고등학교에 자연스럽게 도착할 수 있다. 또 지하철역에서 수험장까지 가는 길 곳곳에는 삼성직원들이 ‘진행’이라는 명찰을 차고 수험생들을 반겼다. 그들은 초일류기업 ‘삼성맨’임을 뽐내듯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시험은 오전 9시 20분부터 오전 11시 50분까지 진행됐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 국내 5개 지역과 미국 뉴어크, 로스앤젤레스(LA), 캐나다 토론토 등 해외 3개 지역, 82개 고사장에서 10만 여명이 참여한 이날 시험에는 수천 명의 삼성그룹 임직원이 감독관으로 참여했다.

취재를 위해 응시한 본 기자도 시간에 맞춰 고사장에 도착해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목동고 25검사실’이다. 검사실? ‘아, 검사받으러 왔구나’ 내가 본 시험은 직무적성검사였다지만 ‘검사실’이 주는 어감은 묘했다. 제품 검사받는 것도 아니고. 서둘러야 했던 입실과 달리 대기 시간은 느긋했다. 오전 9시 20분까지 기다리는 동안 지원자들은 긴장한 채 순한 어린양이 됐다. ‘책상 위에 음료를 치워달라’는 감독관의 부탁에 일제히 물을 보이지 않게 숨긴다. 토익시험이었다면 신경도 쓰지 않을 만한 주문이었다.

감독관들은 신분 검사를 수험표에 찍힌 QR코드를 이용해서 했다. 이번에 처음 SSAT를 보는 이 아무개씨(27,남)는 “신분검사부터 뭔가 다르구나. 역시 '삼성전자'”라고 말했다. 삼성바이오에피스에 지원한 이 씨는 최근에 E 그룹의 인적성검사도 봤다. 이 씨는 “E그룹은 오후 2시가 넘도록 밥도 주지 않고 봐서 힘들었다”며 “삼성은 답안지 나눠줄 때도 지원자에게 각각 인사를 했다”고 SSAT에 호감을 표했다.

삼성그룹 채용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세계 초일류 기업’이라서만은 아니다. 서류전형이 없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지원자 모두에게 SSAT를 보게 하고 통과한 사람들에게 에세이 등의 서류를 요구한다. 감독관 뿐 아니라 채용 과정도 친절한 삼성이었다. SSAT는 쉬는 시간 없이 언어·수리·추리·시각적 사고·상식 다섯 영역을 각각 제한 시간동안 풀어야 한다.

하반기 채용인 이번 시험이 상반기 보다 어려웠는가는 지원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모두 동의하는 건 시간 내에 다 푸는 사람은 없을 만큼 난이도가 높다는 것이다. 모르는 문제를 찍으면 감점이라는 안내방송 탓에 고민만 하다가 시간만 날린 문제도 많았다. 선택지 두 개 중에 고민하다가 찍는게 익숙했던 대한민국 평범한 20대에게 ‘틀리면 감점’이라는 말은 재앙이었다.

삼성은 만능을 원했다. 어울리는 단어를 고르는 문제, 연립방정식을 빠르게 계산해야 하는 문제, 역사나 철학 그리고 삼성제품 관련 기술문제까지 다양했다. 공간지각 문제인 전개도 문제에는 시험지를 이리저리 돌려보지 말라는 ‘깨알같은’ 안내방송이 추가됐다. 갑자기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는 SSAT가 공평하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난 도형 공부를 놓은 지 10년은 됐다고!’

   
▲ 12일 오전 11시 50분, 서울 양천구 목동고등학교에서 시험을 마친 응시생들이 고사장을 나서고 있다. 삼성그룹은 응시생들이 부담스러워 하므로 고사장 내에서 사진 촬영을 자제해달라는 입장이었다. 장슬기 기자
 

시험이 끝나자 지원자들의 한숨이 이어진다. 아니, 사실 각 영역이 끝났다는 안내방송이 지원자들의 한숨을 묻었는지도 모른다. 인천에 사는 취업준비 생활 3년 차이자 SSAT 재수생인 김 아무개씨(27,여)는 삼성 디스플레이에 지원했다. 고사장인 서울 광진구 광남중학교까지 두 시간을 넘게 와서 SSAT를 봤는데 느낌이 좋지 않다. 김 씨는 “상반기보다 어려웠다”며 소감을 남겼다. 짧은 한마디에서 피로감이 묻어났다.

누구에게나 시험을 볼 기회를 주는 만큼, 더 많은 이들이 시험을 끝내고 희망고문으로 맘을 졸인다.  9만 ~10만명의 지원자 중 4000 ~ 5000명만 삼성의 정규직으로 입사하는 가운데 SSAT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1995년에 폐지했던 서류전형을 내년부터 부활할 계획이다.

상반기에 서류전형을 부활하려다 대학별 할당 인원이 공개돼 대학서열화라는 비판으로 곤욕을 치렀던 바람에 무산됐다. 매년 두 차례 진행된 채용에서 삼성은 총 100억원 가까운 비용을 쓴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SSAT는 연수원에서 열흘이상 출제위원들이 합숙하며 휴대전화 사용도 못한 채 출제한다. 이쯤 되면 취업계의 ‘수능’이라 불릴 만하다.

지원자들은 대체로 안타까워하는 분위기다. 내년에 삼성그룹에 지원할 생각으로 SSAT를 준비하던 황 아무개씨(24,여)는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하길래 준비중인데 허무하다”며 “삼성 입장이 이해는 되지만 우리(지원자)입장에선 좋지 않다”고 말했다. 서류전형이 생기면 학벌·나이·학점 등 스펙이 중요해질 것이란 불안감 때문이다.

   
▲ 삼성그룹은 이르면 이달 말 계열사별로 SSAT 합격자를 발표하고 각 계열사는 내달 SSAT 합격자에 대한 면접을 실시한 후 4000~5000명의 최종합격자를 선발한다.
 

원래 취준생 입장에서 삼성은 고마운 존재였다. SSAT 기회를 공평하게 주고, 시험 날 감독관들의 친절한 안내도 맘에 든다는 분위기다. 입사하면 주변에서 보는 시선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감을 품기에도 좋다. 상반기에 SSAT를 봤던 직장인 박 아무개씨(24, 여)는 “SSAT를 기본으로 준비하면서 다른 회사의 인적성검사의 유형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취업준비를 했다”며 “아무래도 제일 큰 기업을 (다른 기업들이) 따라가게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오전 11시 50분. 답안지와 문제지는 물론 수험표까지 싹 걷어간 뒤에 시험이 끝났다. 전체 160문제 중 3분의 2정도 풀었나 싶을 정도로(물론 기자 본인의 얘기다) 어려운 시험이었지만 수험생들은 다들 희망을 품고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 번듯한 정규직으로 가는 문은, 수험생들이 일렬로 줄지어 양천구청역까지 가는 인도보다 더 좁게 느껴진다. SSAT를 통과한 4000 ~5000명에 속하지 못한 9만여 명의 청춘들은, 삼성의 ‘또 하나의 가족’이 되지 못한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취업의 망망대해에서 다시 표류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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