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보는 한국 언론 민주화 운동의 역사다. 그의 별세 소식에 언론인들이 비통에 잠기는 건 그가 평생을 다해 싸웠던 언론 자유와 독립이라는 가치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통과하고 있는 지금,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이루기 요원한 과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8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난 고인은 한국 언론 자유 쟁취를 위한 저항을 상징하는, 1974년 10월 ‘자유언론실천선언’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고인은 엄혹했던 80년대 전두환 신군부 집권기에도 언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1984년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전신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초대 사무국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19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을 맡으며 재야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1988년 한겨레 창간 작업에 참여해 초대 편집위원장을 맡았다가 한겨레를 떠난 뒤 언론개혁시민연대와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언론운동을 이끌었다. 자유언론선언 40주년을 코앞에 두고 들려온 갑작스러운 비보는 지인들을 더욱 비통에 빠지게 했다.  

고인과 각별한 연이 있던 이들의 증언을 통해 그의 삶을 돌아봤다.

   
고 성유보 동아투위 위원.                                                              이치열 기자 truth710@
 

“삼국지에서 방통을 아는가? 외모는 보잘 것 없지만 천하를 보는 사람이다. 고인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이부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이부영이 본 성유보

이부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은 고인과 대학동기, 동아일보 입사 동기다. 고인과 해직의 아픔도 함께 했다. 이들은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 해직된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다. 1975년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함께 재판을 받기도 했다. 이 고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대학교 다닐 때 고인과 동아리를 함께 했었다. 공부하고 토론하는 동아리다. 그 동아리가 동아일보에서도 이어졌는데 거기선 동아일보 문제에 대해 논의를 했다. 그러다 한 명이 민청학련 배후로 지목이 됐고 곧 수배를 받게 됐다. 중앙정보부에 쫓겼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잡히면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 사건(청우회 사건)으로 우리는 체포됐다. 반국가단체를 결성했다는 이유다. 국보법으로 구속됐고 고인과 나는 함께 재판을 받았다. 나는 긴급조치까지 겹쳐서 18년 구형을 선고받았고 실제로는 2년 정도 감옥에 있었다. 고인은 1년 정도 서울구치소에서 복역했다. 구치소 안에서는 교도관들을 통해 가끔 소식을 듣는 정도였다.”

이 고문은 “그 이후에도 계속 같이 움직였다”며 “54년 친구다. 70세가 넘으니 누가 먼저 가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됐지만 그래도 몸 반쪽이 떨어져나간 느낌”이라고 했다. 고인은 꾸밈이 없었다. 소탈했다. 이 고문은 고인의 성품에 대해 “차분하고 느린 친구다. 빗질도 하지 않고 다녔다. 구두를 제대로 닦지도 않았다”며 “줄 잡힌 바지를 입은 것도 한 번 보지 못했다. 한없이 소탈했고 생각이 깊고 넓었다”고 기억했다.

   
▲ 이부영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사진 = 연합뉴스)
 

김종철이 본 성유보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 겸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동아투위 민권일지 사건’을 떠올렸다. 동아투위는 1978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4돌에 맞춰 <동아투위소식>을 배포했다. <동아투위소식>에는 제도권 언론에서는 볼 수 없는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소식 125건(‘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 사건 일지’), 언론을 탄압하는 제도와 법 철폐를 주장하는 내용의 글(‘진정한 민주·민족언론의 좌표’) 등이 담겨 있었다. 김 위원장과 고인은 이 소식지로 감옥살이 등 고초를 겪는다. 언론 탄압 조치를 명시한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긴급조치 9호 시절, 78년 10월. 그때 일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당시 신문과 방송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후 언론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에 대해 민주민권 일지를 등사기로 만들어 돌렸다. 성유보, 안종필, 나도 함께 했다. 잡혀가서 1년 감옥살이를 했는데 그때부터 (고인과) 고락을 같이 하게 됐다.”

김 위원장은 “지난 2일 광화문에 20명 정도가 모여 망가진 한국언론에 대해 회의를 했다”며 “고인이 사회를 보셨는데 노란 얼굴이었다. 급성 황달 증세였다”며 “다음날 (고인이) 몸이 너무 좋지 않아 일산병원에 갔는데 췌장암 말기라더라. 지난 7일 아침에는 긴급조치 관련해서 배상재판 문제를 논의하려고 통화를 했다. 그게 마지막 통화였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동아투위가 113명이다. 이번에 고인이 떠나면서 19명이 세상을 떴다. 곧 자유언론실천선언 40주년이고 내년은 해직 40년이다.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사진 = 김도연 기자)
 

최민희가 본 성유보

“성유보 선배가 추구했던 건 언론 자유와 독립, 그리고 정론이다. 언론 자유가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들어서 많이 위축됐다. 그의 죽음은 다시 ‘언론바로세우기’에 동참하라는 초대장이라고 생각한다.”(최민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고인은 84년 언협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듬해 시사월간지 <말>을 창간했다. 최민희 의원은 월간 <말> 1호 기자였다. 최 의원은 “해직 언론인 선배들은 말지를 창간하고 전두환 독재정권 보도지침을 폭로했다”며 “도피, 구속, 감옥으로 이어지는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해직 언론인들은 늘 균형감각을 지녔고 품위를 지켰다. 성 선배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었다”고 밝혔다. 최 의원은 86년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86년 9월 <말>지가 보도지침을 폭로했다. 당시 안기부가 사무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두 분이 가장 선두에서 막았다. 창간 주역 송건호, 성유보 선배였다. 성 선배에게 구속과 투옥은 삶의 일부였다. 감옥에서도 답답해하거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다. 물욕이 없었다. 도인 같았다. 그의 눈웃음이 기억난다. 나는 학생운동하다 투옥됐고, 노동현장 활동을 하다 '말'지에서 첫 사회생활을 했다. 성 선배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 최민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사진 = 연합뉴스)
 

장연희가 본 성유보

10일 만난 부인 장연희(70) 여사는 덤덤했다. 장 여사는 “성유보는 농도 있게 재밌게 잘 살다 갔다”면서도 “다만 할 일이 많으니까 3년만 더 살다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쉽다”고 했다. 그는 “성유보는 고등학교때까지 모범생이었다”며 “대구 경북고등학교 시절 2.28 대구학생연합데모를 하며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나쁜지 알았던 거 같다. 그러고 나서 서울대 정치학과 들어갔고, 그때 열정으로 평생을 살았다”고 회고했다. 남편이 한겨레신문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실상 수입이 없었다. 장 여사는 출판사 외판원으로 직접 뛰어다녔다. 그 남편에 그 아내다.

“성유보는 75년과 79년 두 번 감옥에 갔다. 내가 남산에도 가고 남영동에도 많이 갔다. 내 기억으로 81년인데 당시 중정 직원이 나한테 명함을 주고 가더라. 남편 잡아갈거라고. 시아버지가 병원에서 퇴원해 집에 왔는데 성유보가 수박 사러 잠깐 나갔다. 한참 있다가 동네 꼬마가 수박을 들고 오는 거야. 슬리퍼 신고 반팔, 반바지만 입고 있는 사람을 끌고 간거지. 그래서 내가 전에 받았던 명함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해서 호통을 쳤지. 왜 옷도 제대로 안 입은 사람을 데려 가느냐고. 그래서 덕수궁 앞으로 나오라고 했지. 옷 바꿔 입혀서 데려가라고.”

다음은 고인을 기억하는 이들 주요 발언이다.

△ 대구 경북고 42회 동창 윤종명
“지난 9월 13일이 마지막 만남이 될 줄 몰랐다. 그날은 1960년 2.28 대구학생연합데모를 주도했던 고(故) 이대우 전 부산대 교수 5주기 추도모임이었다. 고인은 그날도 몸이 많이 불편했다. 통증을 호소했다. 걸음도 불편해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추도모임이 끝나고 회식이 있었는데 고인은 참여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는 체구도 작고 조용한 친구였다.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던 친구다. 원래 이름은 성철수였다. 그러다 나중에 성유보라는 이름을 쓰더라.”

△ 김명훈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의장
“고인은 성삼문 후손이다. 독하지 않나. 타협도 모르고. 유혹을 해도 끌려가지 않았다. 그랬던 분이라 아쉽다. 그렇지만 언론 운동 역사와 자기 역사를 글로 남겨 놓아서 다행이고, 그것은 소중한 업적이다.”

△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대표 (재야운동가)
“추상적이지만 진실하고 성실한 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쇼맨십이 없었다. 정치적이지 않았다. 언론인이다. 무언가를 적당히 하자는 사람도 아니고 폼 잡는 기자도 아니었다. 동아투위 이후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과 언론자유 운동을 시작했다. 민통련 활동이 핵심적이다. 나를 포함해 민통련에 있던 문익환 목사, 이부영 전 사무처장 등이 다 투옥됐다. 그 어려운 시기에 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다. 바둑을 참 좋아했다. 재야에서는 워낙 유명했고, 독재정권에서도 고인을 ‘나쁘다’고 말하지 못했다. 남과 원수지지 않고 살았다.”

   
▲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대표 (사진 = 연합뉴스)
 

△ 유시춘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87년 6월 항쟁 국민운동본부에서 고인과 함께 일을 했다. 본부에 상임집행위원으로 있었다. 그 당시 우리가 회의를 하면 안기부에서 다 도청을 했다. 이해찬 전 총리, 이미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같이 회의하고 그랬던 멤버다. 그런 엄혹한 상황에서 고인은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셨다. 그분은 형사가 옆에 있어도 평화롭고 태평해보이셨다. 바쁜 게 없어 뵈는 분이기도 하다. 고인이랑은 일산에 사는 이웃주민이었다. 민주화 운동 당시나 최근이나 항상 한결같았다. 속으로는 고민이 많으시겠지만 평화롭고 태평한 분이다. 화려함과 거리도 멀었다.”

△권호경 목사 (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70년대 동아투위 기자들 만날 때 고인도 함께 만났다. 감옥에서도 똑같았다. 걱정이 없어 보였고 타협도 없었다. 가식적인 것도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가족들이 참 고생이 많았을 거다. 해직된 이후로 무슨 돈이 있었겠나. 아마 88년 한겨레신문 일을 하면서 처음 뜨거운 밥 먹었을 거다. 다들 투옥되고 투쟁하던 시절이지만 고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고고했다.”

△홍성우 변호사 (동아투위 변호사)
“동아투위 사람들이랑은 단순히 피고와 변호인 관계가 아니었다. 당시 나는 30대 후반이었다. 해직되고 쫓기는데 돈이 어딨나. 밥 사 먹이면서 변호했다. 안종필, 정연주, 김종철, 성유보. 수없이 그들을 변호했다. 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고 나서 감옥 간 친구들이 다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못 나왔다.”  

△신홍범 전 조선투위 위원장
“고인과는 언협에서 본격적으로 같이 일했다. 고인이 초대 사무국장이었고 나는 언협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84년이었다. 어둡고 긴 터널과 같았다. 그런데 그때는 나이라도 젊지. 고인은 70세가 넘어서도 우리 사회를 위해 고민하는데, 정말 감명을 받았다. 70세가 넘으니까 몸이 고달프고 무언가를 하기가 귀찮다. 아프기도 하고. 그런데 그 괴로운 몸을 이끌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직책(희망래일 이사장)을 맡은 게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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