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3인방 핵심 실세들의 파격적인 남쪽 방문을 계기로 남북 대화의 ‘좁은 길’이 열렸다. 이 길이 남북 간의 ‘대통로’로 확 트이게 될 것인가.

‘대통로’는 남북 정상회담을 뜻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상회담을 한다면 내년 상반기가 적기라는 주장까지 거론된다.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부쩍 커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남북한의 입장 차가 워낙 커 그 기대감이 언제 실망감으로 바뀌게 될지 종잡을 수 없는 게 남북 관계의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남북 간의 고위급 접촉 재개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북한이 남북 개선 의지를 진정성 있는 행동으로 보여 줄 것을 요구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도 여권과 재계에서 나오는 5.24 조치 해제 등과 관련해 대북정책의 원칙 재고는 없다고 북한의 ‘선 조치’ 원칙론을 되풀이했다. 

5.24 조치는 북한의 나진.선봉 지구에 대한 간접 투자 등 한국 정부 스스로가 안 지킨 지 오래된 터다. 실질적으로 이미 반 이상 그 효력을 상실한 5.24 조치를 원칙적으로 적용하겠다고 정부가 원칙론만을 고집한다면 남북 관계가 풀릴 리 있겠는가. 

3년 여의 임기를 남겨둔 박근혜 정부로서는 이번 2차 남북 간 고위급 접촉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일 가능성이 높다. 박 대통령이 마지막 기회를 놓친다면 지난 69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강조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나 동북아평화협력구상, 비무장지대(DMZ) 세계생태평화공원 등과 함께 이의 집약인 '통일대박론'도 사실상 실종될 수밖에 없다.

   
▲ 지난 1월 6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대박론’을 언급하는 박근혜 대통령 (사진=YTN 방송 캡처)
 

‘통일대박론’을 뒷받침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만 보더라도 그 취지와 목표 자체는 우리 민족의 발전 확대와 번영을 위해 당연히 지향해야 할 비전이다. ‘평화의 대륙’, ‘하나의 대륙’, ‘창조의 대륙’ 비전의 개념에 기초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등 강대국들 간 패권경쟁의 충돌지역이 돼버린 한반도의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나가 우리 민족의 잠재력을 극대화함으로써 평화와 번영의 유라시아 시대를 열어가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바탕으로 동북아, 나아가 유라시아를 ‘평화의 대륙’으로, 남북관계의 안정과 북한의 개혁.개방으로 ‘하나의 대륙’, 그리고 ‘창조의 대륙’으로 발전시키자는 게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요체다. 세 가지 대륙 비전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하나의 대륙’ 비전은 한반도 종단철도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되고, 러시아 가스 수송망에 연결된 남한-북한-러시아 가스관이 건설되며, 한국의 선박들이 러시아 극동 항구를 거쳐 북극 지역 항구들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러시아도 극동 개발과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의 협력 강화에 목표를 둔 ‘동방정책’의 추진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경제성장이 둔화돼 새로운 성장 동력의 확보가 시급한 데다가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과 EU 등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가 냉각돼 러시아의 관심이 아.태 지역으로 쏠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시베리아와 극동은 우리의 엄청난 잠재력”이라며 '동방정책'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해왔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러시아의 ‘동방정책’과 결합하게 되면 그 추진력이 가속화되고 실현 가능성이 높아질 거라는 얘기다.

문제의 핵심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서 북한의 호응을 전제로 한 남북관계의 안정과 한반도의 평화가 필수적인 선결조건이라는 점이다. 남-북-러 3자 협력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 종단철도 연결사업, 남-북-러 가스관 사업 등 ‘하나의 대륙’ 비전이 북한의 참여나 협력 없이 가능하겠는가. 단 한 발자국도 진전될 수 없다. 

박 대통령이 ‘통일대박론’에 진정성을 갖고 있다면, 오는 10월 말이나 11월 초 열릴 2차 남북 간 고위급 접촉에서 ‘통일대박론’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거시적 전략 구상과 이를 위한 결단과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야 할 것이다. ‘통일대박론’의 대전략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주적 역량의 확보와 주도력 발휘의 의지 및 노력이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불과 11개월의 짧은 기간에 독일 통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독일의 통일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국의 독일에 대한 권한과 책임의 족쇄를 풀고, 소련과 영국, 프랑스의 반대 입장을 지지로 바꾸는 등 숱한 난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 정부가 자주적인 외교의 역량을 집중적으로 전개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독일 정부의 자주적인 통일 의지는 독일의 통일 문제를 다룰 기구 구성에서 독일이 당사자가 아니라 들러리가 되는 방안들을 배제하고, 동서독이 독일에 권한과 책임이 있는 4개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하는 2+4 회담 기구를 이루어낸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독일 정부의 이런 역량은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 이후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전개된 동서독 간의 교류와 협력의 축적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찌 됐는가. 독일과는 정반대로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상호간 적대적 대결과 적대감을 정략적으로 악용해 절대적인 독재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남북간 적대적 공생체제’가 형성돼 고착되고 말았다. 

선거나 정치적인 고비 때마다 극우 권력의 유지와 강화를 위해 극우 세력은 ‘간첩단 사건’이나 ‘색깔론’, ‘종북몰이’의 판을 벌이지 않았는가. ‘적대적 공생체제’로 인한 정략적 행태로 남북 간 적대감의 골은 깊어만 갔고, 분단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입장이 다르면 ‘빨갱이’나 ‘종북’ 따위로 내몰 정도로 ‘적대적 공생체제’의 폐해가 극심해져 우리 사회 곳곳에서 적대적 갈등과 분열, 폭력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남북한 정권이 민족의 장래와 통일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남북 관계를 정략적으로 악용하는 ‘적대적 공생체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을 제도화하고 일상화함으로써 통일을 위한 자주적 역량과 주도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적대적 공생체제’를 ‘평화적 공영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2차 남북 간 고위급 접촉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나 5.24 조치 해제, 금강산 관광 재개 등으로 남북 관계 개선의 물코가 트이길 기대한다. 빈사 상태에 놓인 6자회담의 재개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이와 함께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평화적 공영체제’의 시대가 개막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남북관계는 접촉 후에도 분위기가 냉각되는 악순환이 반복돼서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백번 옳은 지적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레게 만들었던 7.4 공동선언이 ‘적대적 공생체제’로 인해 휴지처럼 사문화되는 따위의 악순환이 더 이상 반복돼 벌어져서는 안 된다.

국정감사장에서 한 여당 의원이 “정권이 바뀌어도 통할 수 있는 외교 안보 분야 전략이 있냐”고 비판했다고 한다. “최고 전문가가 아닌 양반들이 대선 캠프를 구성해 뚝딱 만든 것이 국가 전략이 되고 5년 뒤에는 쓰레게 통으로 들어간다"고 돌직구를 날렸다는 것이다.

이제야말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우리의 힘으로 스스로 이루려는 확고한 철학을 바탕으로 독일의 경우처럼 정권이 바뀌어도 계승될 대전략과 구상이 나와야 한다. 이번 남북 고위급 접촉을 계기로 이런 대전략과 구상이 나오게 될지, 진정성 있는 ‘통일대박론’의 마지막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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