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대학 공부시켜야 한다고, 그래서 미리 등록금 마련해야 한다고 악착같이 일만 했어. 자기 라인 업무가 끝나면 자청해서 다른 라인 일을 하던 사람이었어. 아무튼 ‘독종’, ‘일벌레’였어. 생활이 좀 나아지나 싶었는데….”

‘유민아빠’ 김영오씨에 대해 묻자 한 직장 동료는 이와 같이 말했다. 김씨는 모두가 인정하는 ‘독종’이자 ‘일벌레’였다. 세월호 침몰사고 당일에도 2교대 야간 교대근무(오후 8시~오전 8시)를 마치고 아침 퇴근했다. 딸 유민양과의 만남도 주말 특근으로 지키지 못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얻은 정규직 삶을 딸들과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채 김씨는 첫째 딸 유민양을 잃어야만 했다. 그의 삶, 몇 장의 페이지를 확인하고자 29일 서울 동부시립병원을 찾았다.

   
▲ 29일 오후 김영오씨가 서울 동부시립병원에서 미음을 들고 있다. 조금 회복한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여전히 그는 말라 있었다. (사진 = 김도연 기자)
 
   
▲ 단식 중단 이후 김영오씨의 식단. (사진 = 김도연 기자)
 
   
▲ 김영오씨가 29일 서울 동부시립병원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 = 김도연 기자)
 

보식 2일째. 이날 오후 7시께 미음을 뜨던 김씨는 조금 기력을 회복한 듯했다. “10년이 넘도록 감기 한 번 걸려본 적 없었어.” 안부를 묻는 기자 앞에서 자신이 ‘강골’임을 으스댔지만 그의 모습은 여전히 피골상련했다. 기자가 그에게 궁금했던 것은 그가 어떻게 ‘일’을, 다시 말해 ‘노동’을 해왔을까였다. 금속노조 논란도 있었지만 그보다 그의 얼굴에서 묻어나오는 지난한 세월의 흔적이 남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기업 납품을 하는, 충남 아산의 한 차체(車體)부품 생산업체에 2012년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이듬해 정규직이 됐다. 앞서 말한 직장 동료는 “회사도 인정할 정도로 열심히 했고, 2년도 안 돼서 정규직이 됐을 정도로 내부에서도 인정했던 사람”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힘들게 일하셨죠?”라는 질문을 듣자마자 그가 보여준 것은 근무 일정표였다. 2014년 3월, 토요일은 모두 ‘특근’으로 표시돼 있었다. 사고 난 4월에도 12일과 13일은 ‘특근’이었다. 사고 직전인 4월 13일은 유민양과 만나려 했던 날이었다.

“나는 차체 로봇이 용접을 하면 제대로 됐는지 검사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어요. 중형차인 소OOO 라인에 있었는데, 소OO 등 다른 차 라인도 가리지 않고 일을 했어. 토요일에 쉬지 못했어. 거의 매일 일하다시피 했어. 난 연차도 거의 안 썼어요. 연차수당 받을라고. 가장 많이 받았어. 일벌레라 소문이 났을 정도였어. 그래도 이자 갚고 아이들 보험료 내고 하면 얼마 안 남더라고.”

   
▲ 29일 김영오씨가 서울 동부시립병원에서 인터뷰 직전 식사를 하며 TV를 시청하고 있다. (사진 = 김도연)
 
   
▲ 2014년 3월 김영오씨 근무시간표. (사진 = 김도연 기자)
 

김씨는 이전 직장에서도 ‘독종’으로 평가 받았다. 안산의 한 휴대폰 부품업체에 2006년 파견직으로 입사해 2011년 퇴사했다. 8개월 만에 ‘반장’을 담당했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그러나 비정규직의 삶은 불안했다. 근속연수는 인정되지 않았고 열심히 일해도 월 평균 180만원 안팎의 급여가 전부였다. 당시 마이너스 통장의 빚만 1800만원. 이자가 한 달 월급 수준이었다.

일감도 들쭉날쭉했다. 비수기에는 받는 돈이 150만원에 미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열악한 3교대 근무에다 명절마다 특근을 해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수년 동안 제때 뵙지도 못했다. 40대 중반이라는 나이 때문에 취업난도 겪은 그였다. 그의 삶은 한국 비정규직 그 자체였다.

그런 그에게 일부 보수 언론이 금속노조 소속이라는 이유로 가하는 마녀사냥은 사실상 폭력이었다. 김씨는, 노동조합이라는 한국사회 ‘느슨한’ 울타리의 보호조차 받지 못했던 약자였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2013년 7월 정규직이 돼서야 삶에 작은 숨통이 트였다. 정규직 전환 소식을 들었을 땐 어땠을까.

“어휴,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해. 자녀 대학 입학금이 무료라는 얘기가 가장 기뻤어. 유민이 유나한테 정규직이 되자마자 ‘이제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거 다 해줄 수 있으니까 마음껏 공부해’라고 했지. 그때 기쁨은 말로 설명 못해. 정말 진짜 너무 힘들게 일만 하고 살았는데 드디어 보상 받는구나 싶었지. 성수기, 비성수기 평균 2200만원 정도가 연봉이었는데, 정직원이 되고 나서부터는 세금을 떼도 한달에 300만원을 주더라고.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나 싶었어.”

   
▲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2010년 통장 거래 내역. (사진=김영오 제공)
 

국궁 논란이 거셌다. 귀족 스포츠하면서 양육비를 보내지 않았다는 유언비어가 그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김씨는 통장 거래 내역까지 공개하면서 적극 해명했다.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언론에 대한 비판이 폭발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실상은 달랐다. 월 회비 3만원 국궁은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아니 ‘최초’의 취미였다.

“난 야구도, 축구도 모르고 살았어. 취미? 글쎄…. 이혼 후 혼자 살다보니 너무 외롭더라고. 솔직히 (이혼) 이후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봤어. 여자친구 하나 만나기가 어렵더라고. 집에 가서 소주 한 잔에 담배 한 모금 피우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어요. 하루에 한 병. 술이 수면제 역할을 하더라고. 11년을 그렇게 살았어. 무조건 일만 했어. 이전 직장에서는 한 달에 딱 하루 쉬고 일했을 때도 많았으니까. 아까 말했잖아. 내가 체력이 대단해요.(웃음) 젊은 친구들도 주말 쉬는데…. 근데 2012년 국궁을 하면서 술이 줄었어요. 음주로 몸 망가뜨릴 바에 산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하자고 마음먹었지. 회사 사정도 조금 나아졌던 것도 있고.”

앞서 3월 그는 두 딸과 단체 카카오톡 대화를 했다. 5월 3일에 함께 여행을 가기 위해서다. 여행 전 설렘도 미처 느껴보지 못한 채 유민양은 세상을 떠났고, 김씨는 아이들과 좋은 추억을 보내지 못한 것이 지워지지 않을 한으로 남았다. 펜션 여행을 가서 딸들과 무엇을 하고 싶었냐고 물었다.

“고기를 먹고 싶었어. 바비큐 파티 같은 거. 아이들이 고기를 좋아하거든. 삼겹살 같이 먹고, 이야기하고. 내 손으로 직접 구워주고 싶었어. 참 일이 안 될라니까…. 그런데 유민이는 좋은 데 갔나봐. 49재 지나고 꿈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더라고. 좋은 곳으로 가면 꿈에 안 나타난다던데 다행이야. 49재 때 뭐했는 줄 알아요? 여자 장신구를 샀어. 거울, 시계, 팔찌, 머리핀. 태워주려고. 살아있을 때 잘해줬어야 했는데 못해줘서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 그날 액세서리 가게 앞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 김영오씨가 29일 서울 동부시립병원에서 둘째 딸 유나씨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접 쓴 편지를 읽어보고 있다. (사진 = 김도연 기자)
 

한 아버지가, 한 노동자가 이제는 ‘투사’가 됐다. 그를 따라 동조단식을 신청하거나 참여한 사람만 3만여 명.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시민사회의 움직임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노동계·언론계·종교계·학계 명망가는 물론,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단식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가 떠난 광화문 농성장은 시민이 지키고 있다. 그와 연대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시민들에 대해 물었다.

“앞서 말한 대로 난 혼자 그렇게 살던 사람이었어. 예전엔 카카오 스토리에도, 페이스북에도 댓글 하나 안 달렸는데.(웃음) 지금은 너무나 많은 분들이 찾아주고 힘을 줘. 나를 지켜봐주는 사람이 이리도 많다니…. 누군가가 내 앞에서 나를 위로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막 무릎을 꿇으려 할 때 너무나 죄송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뭉클해. 어깨가 무거운 것은 사실이에요. 많이 무거워. 우리가 원하는 특별법이 제정이 된다면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그땐 언론 앞에 안 설 거야.”

“가장 힘이 날 때는 아이들이 특별법이 왜 필요한지 알고 있거나 알게 됐을 때야. 그 아이들이 ‘아빠라고 부를게요’, ‘아빠 편에 설게요’라고 할 땐 없던 힘도 생겨. 굉장히 어린 10대, 20대 친구들이 세월호 특별법을 알았다는 사실은, 내가 당장 싸우다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30대, 40대가 됐을 때는 이 나라가 바뀌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만들어. 희망. 정말 많은 이들이 깨어난 것 같아. 그러니까 제정될 때까지 싸워야지.”

   
▲ 서울 청운동 주민센터 유가족 농성장에 걸려 있는 단원고 학생 사진들. (사진=김도연 기자)
 

마지막으로 세월호 특별법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 물었다. 

“내가 그렇게 단식을 하게 된 것은 정부 때문이야. 정부와 박근혜 대통령이 유가족을 외면하고 시간을 끌어서 이렇게 된 거 아녜요? 난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렇게 불통일 줄은 몰랐어. 밥까지 굶으면서 싸우는 사람을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이리도 외면할 줄은 몰랐어. 정치에 대해서 잘 몰랐어요. 이젠 정말 빠삭하게 알아버렸지.”

“국민들이 땅바닥에서, 유가족이 4~5개월 길바닥에 나앉아 있는 상황이 정상은 아니잖아. 머리털 나고 이렇게 독한 나라는 처음 봤어. 아니, 언제까지 사람들을 길바닥에서 재울 거냐고. 명절 차례 상을 광화문에서 치르게 생겼어. 나를 찾아온 의원들에게 말했어요. ‘제발 추석 전에는 유가족이 원하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해달라’고. 얼른 다들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이게 나라야? 이게 한 나라냐고. 대통령이 대답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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