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방송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서울 광화문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한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뙤약볕 아래 파업에 참가했던 희망연대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이른 서늘바람을 맞이할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티브로드 하청 노동자들의 노숙농성은 9일로 40일, 씨앤앰 하청노동자들은 33일째다.

한 달이 지났지만 원청 씨앤앰‧티브로드 “…”

희망연대노동조합 씨앤앰지부, 케이블비정규직지부, 케이블비정규직티브로드지부 소속 조합원 500여 명은 흐트러짐 없이 9일 오후 4시 서울 광화문 파이낸셜센터 앞에 다시 섰다. 이곳에 입주해 있는 씨앤앰 대주주 MBK파트너스를 규탄하기 위해서다.

이번 사태는 실질 사용자인 원청이 노사 협상 테이블에 나서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전망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 인상 및 노동 권리 개선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은 협력업체가 아닌 원청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원청 씨앤앰과 티브로드는 묵묵부답이다.

   
▲ 희망연대노동조합 씨앤앰지부, 케이블비정규직지부, 케이블비정규직티브로드지부 소속 조합원 500여 명이 9일 오후 4시 서울 광화문 파이낸셜센터 앞에서 씨앤앰 대주주 MBK파트너스와 맥쿼리를 규탄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riverskim@)
 
방송‧통신업계 간접고용비율이 60%를 훌쩍 넘는 현실속에서 희망노조 소속 노동자들이 이처럼 악전고투하는 이유는 단순 임금 문제를 넘어 통신업계에 숙주처럼 자리잡은 간접고용을 뿌리 뽑기 위해서다.

박대성 희망연대노조 조직쟁의국장은 이 자리에서 “그동안 주간 60시간, 한 달 딱 2번 쉬면서 200만 원 남짓 받았다”며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씨앤앰 협력업체 사장들은 임금 20% 인하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박 국장은 “이 투쟁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노조의 승리 여부가 다른 간접고용 노동자 처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김승호 티브로드지부 안양지회장은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 자본이 시키는 대로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러나 회사는 노동자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노동자가 회사 기틀이 돼야 한다. 저들을 각성하게 하고 깨우치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밝혔다.

우리 투쟁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세월호”

희망연대노동조합은 지역사회 연대를 강조하는 지역일반노조다. 서울‧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노동자들이 직장‧업종‧고용형태와 관계없이 가입할 수 있다. 지역 노동자 연대를 강화하여 사회권 및 생활, 문화적 권리를 확보한다는 조직 이념이 특징이다.

김진억 희망연대노조 나눔연대사업국장은 이날 규탄 대회에서 “우리 싸움은 단순히 임금 몇 푼 더 받자고 하는 싸움이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생존권과 자존심을 걸고 하는 싸움”이라며 “지역사회와 연대, 사회연대에 대한 실천이 있기 때문에 (희망노조 투쟁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래서 더욱 원청에 패할 수 없다”고 밝혔다.

   
▲ 희망연대노동조합 씨앤앰지부, 케이블비정규직지부, 케이블비정규직티브로드지부 소속 조합원 500여 명이 9일 오후 4시 서울 광화문 파이낸셜센터 앞에서 씨앤앰 대주주 MBK파트너스와 맥쿼리를 규탄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riverskim@)
 

이들은 광화문 세월호 단식 농성장을 곁에서 묵묵히 지키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과 연대는 계속되고 있다. 희망노조 조합원들은 세월호 관련 주말 집회에 빠짐없이 참여할뿐더러, 지난 7일에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과 책임자 처벌 촉구를 위한 자전거 행진’에도 참여했다. 오는 12일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는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위와 함께 ‘광화문 그리고 태평로 거리 태평하지 못한 사람들의 문화제’를 연다.

김 국장은 “청와대는 경기부양책을 얘기하면서 정작 비정규직 노동자는 외면하고 있다. 또 청와대는 세월호 유가족을 외면하고 있고, 여야는 야합으로 유가족과 약속을 저버렸다”며 “유가족은 희생자 의사상자, 대학특례입학 등을 요구한 적이 없다. 진실규명과 재발방지대책만을 원했을 뿐이다. 제대로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청와대 항의 차원에서 공동규탄 대회가 끝난 오후 6시 30분경 청와대 인근에서 협력업체 직장폐쇄와 간접고용 실태를 알리는 거리 선전전을 펼치기도 했다.

세월호와 비정규직, 그리고 무책임한 권력

오후 7시 세월호가족대책위가 주최하는 문화제 <“광화문에서 외침!”>이 열렸다. 주최 측 추산 시민 1만여 명(경찰추산 1천800여 명)이 모인 대규모 문화제였다. 희망노조 조합원들도 7시 30분부터 문화제에 참여했다.

문화제 맨 앞자리는 단식 27일째인 단원고 2학년 고(故)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오씨였다. 단상에 오른 김 씨는 “저는 16일까지 단식을 한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며 “그때까지 법제정이 안 되면 관을 짜서 죽을 때까지 단식을 하겠다. 대통령 고집이 센지 내가 센지 해보겠다”고 밝혔다. 이어 “국민 여러분, 8월 15일 촛불을 밝혀 달라. 그때까지 버티겠다. 믿어 달라”며 집회 참여를 호소했다.

   
▲ 단식 27일째인 단원고 2학년 고(故)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오씨가 9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에 열린 문화제 <“광화문에서 외침!”>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단식농성을 끝까지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사진= 김도연 기자 riverskim@)
 

문화제를 지켜본 희망노조 케이블비정규직지부 조합원 양근영(34)씨는 “자본가나 정부, 그리고 정치권력은 크게 다르지 않다”며 “국민을 대변해야 할 국회가 기득권을 놓치기 싫어서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을 무시한 것 같다. 자본도 자기 이익만을 위해 노동자 권리는 안중에 없다. 먹고 튈 생각만 한다”고 비판했다. 양씨는 “유가족이 요구하는 세월호 특별법은 ‘세월호’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지 안전사회를 위해선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법”이라고 했다.

또 다른 조합원 정희도(35)씨는 “우리 농성장이랑 가까워서 그런 것인지 세월호 단식 농성장을 많이 찾았다”며 “주변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과 관련해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더라. ‘빨갱이’ 운운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밝혔다. 정씨는 “그럴 때마다 ‘직접 와서 유가족들을 지켜보고 얘기해보라’고 말한다”며 “언론이 제공하는 잘못된 정보를 접했기 때문 아닐까. 진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은 참 아쉽다”고 밝혔다.

희망노조 조합원들은 이날 ‘시민의 외침’이라는 순서에서 직접 단상에 올랐다. 김영수 희망노조 케이블비정규직지부장은 “저희는 정부 규제완화로 정규직에서 쫓겨나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며 “이 일이 천직인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100명이 넘는 구성원들이 부당한 해고를 당했다. 직원 900명이 직장폐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 김영수 희망노조 케이블비정규직지부장과 조합원들이 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문화제 <“광화문에서 외침!”>을 통해 세월호 참사 관련 연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 김도연 기자 riverskim@)
 

김 지부장은 “세월호가 침몰하기 전에 선박 불법 개조와 관련해 그것을 개선하려는 노동자 목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해진해운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며 “그때 개선하고 바꾸었다면 세월호는 그렇게 허무하게 우리 눈 앞에서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또 “지난 4월 16일 서서히 침몰하는 세월호를 온 국민은 지켜보고 있었다. 죽어간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며 “반드시 유가족이 원하는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안전한 국가가 될 수 있도록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이 싸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희망연대노조 소속 조합원들이 9일 열린 세월호 문화제 <“광화문에서 외침!”>에 참여하는 모습. (사진=김도연 기자 riverskim@)
 

고된 노숙농성…“반드시 승리하고 싶다”

문화제가 끝난 오후 11시. 조합원 70여 명은 다시 광화문 파이낸스센터 앞으로 모였다. 노숙농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합원 박인수(가명, 47)씨는 “그동안 더위 때문에 힘들었는데 오늘은 서늘한 바람이 부니 그나마 낫다”면서도 “4일에 한 번 노숙을 했다. 나처럼 나이가 있는 사람들에게 노숙은 버거운 일이다. 몸살과 감기가 함께 오더라”고 밝혔다.

박씨는 “그러나 ‘고생하시네요. 힘내세요’라는 시민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큰 힘이 된다”며 “처음엔 조금 고생하면 될 줄 알았다. 길어지니까 자녀 등록금, 대출금 등 생계와 가족을 걱정하는 동료가 늘었다. 다들 그런 걱정은 한 번씩 했을 거다”고 말했다.

   
▲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비정규직지부 조합원들이 9일 오후 11시 30분께 노숙농성을 위해 다시 서울 광화문 파이낸셜센터 앞으로 모였다. (사진=김도연 기자 riverskim@)
 
박씨는 “재계가 우리 싸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승리하면 연이어 비정규직 노조가 활성화하지 않겠나. 어떻게든 막으려 하겠지”라며 “하지만 반드시 승리하고 싶다. 많은 비정규직들이 지켜보고 있다. 무엇보다 현장으로 돌아가 일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70여 명이 두 줄로 어깨를 맞대고 누웠다. 편할리 없는 한뎃잠이건만 바로 곯아떨이지는 조합원도 있었다. 잠자리가 불편한지 뒤척이는 조합원, 늦은 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조합원들까지. 가을의 문턱에서, 길위의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길고 긴 하루는 또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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