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세운 이 나라에서는 진상을 덮으려 하고 우리에게 침묵을 종용하는 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습니다. 이웃의 곁에서 애통해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불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교황 성하, 하느님 당신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정의로 우리의 궁핍한 처지를 돌봐 주십시오.”(프란치스코 교황님께 드리는 편지 中)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열리는 오는 16일은 세월호 참사 발생 4개월이자 유가족들의 특별법 제정 촉구 단식 33일째 되는 날이다.

아울러 현재 광화문에는 장애인들이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등 폐지를 요구하며 지하보도에서 2년째 농성을 하고 있으며 케이블방송 해고노동자들은 서울파이낸스센터 빌딩 앞 등에서 한 달 넘게 노숙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와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공동행동, 서울희망연대노동조합 등은 5일 오전 광화문 광장에서 ‘교회 밖으로 나가 증언하고 형제자매들과 교류하라’고 했던 교황 방한을 앞두고 “희망을 잃고 절망하고 있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거리에서 함께하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광화문광장 주변에서 농성 중인 세월호 참사 유족, 장애인,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교황 방한 관련 호소 기자회견이 5일 오전 열렸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이들은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드리는 편지’를 통해 “교황께서 집전하시는 미사를 치장한다는 이유로 저들이 우리를 광장에서 쓸어내는 일이 없도록 찾아와 달라”며 “익숙해지지 않는 우리의 고통을 위로해 주고 길거리에 나와 탄원하는 방법밖에 찾지 못한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리를 몰아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멈추지 않는 분노를 깨끗이 용서해 달라고 주님께 청원해 달라”고 간청했다.

세월호 참사 100일이 한참 지나도록 유가족들의 식음을 전폐한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요구를 정부와 여당이 외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이들은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탄 배가 왜 침몰했는지, 왜 단 한 명도 구조되지 못했는지 알지 못한다”며 “인간이 세운 이 나라에서는 진상을 덮으려 하고 우리에게 침묵을 종용하는 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지 못해 생존권을 위협받고 장애인과 간접고용으로 노동자들이 노동3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이 죽음과 마찬가지여서, 죽는 길이 사는 길이어서 교회에서 말하는 크나큰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며 “광화문의 높은 빌딩에 자리를 잡은 투기 자본과 대기업의 탐욕은 식구를 먹여 살리는 가장이거나 자립을 이제 막 시작한 여성노동자를 가리지 않고 집어삼켰다”고 덧붙였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공식일정에 포함된 '꽃동네' 방문을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박경석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교황은 언제나 낮은 곳, 아픈 곳을 다니시며 힘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번 방한 때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지역사회와 격리하고 있는 대규모 시설을 방문한다고 한다”며 “우리는 장애가 심하더라도 소외와 차별을 받는 대규모 수용시설이 아니라 이곳 지역사회서 살고 싶다. 진짜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것은 바로 장애인들이 농성하는 광화문으로 오시는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종탁 서울희망연대노조 위원장은 “자본과 권력은 노동자를 만나 노동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노동자를 치우고 정리하려고만 한다”며 “멀쩡한 직장을 두고 직장폐쇄를 맞아 거리로 나와 있는,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일했던 일터에서 계약해지와 업체변경이란 이름으로 해고돼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을 교황이 만나줬으면 좋겠다”며 밝혔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를 위해 지하철 광화문역에서 2년 동안 농성중인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공동행동 회원이 '꽃동네'가 아닌 광화문역에 진짜 '꽃'이 있다며 교황의 광화문역 방문을 촉구하는 영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다음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드리는 편지’ 전문이다.

찬미 예수님!

교황 성하가 이 땅에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었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성하께서 이곳 광화문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시기 이전에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 받고 있는 고통에 먼저 귀 기울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 가운데 신자인 자도 신자가 아닌 자도 있습니다만, 여기 핍박받고 소외된 우리들은 우리가 울부짖을 때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양떼를 잃은 목자인 당신께서도 단 한 마리 양을 찾는 일에 전력을 다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 한 명 한 명이 더 없이 소중했던 우리의 자식, 부모, 형제와 자매를 잃었습니다. 학교 친구들과 또는 가족들과 떠난 여행길이 이 세상에서 걸었던 마지막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탄 배가 왜 침몰했는지, 그리고 왜 단 한 명도 구조되지 못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식사를 중단했습니다. 침식을 잊고 지낸 지 넉 달이 다 되어가는 육신이 차츰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세운 이 나라에서는 진상을 덮으려 하고 우리에게 침묵을 종용하는 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습니다. 이웃의 곁에서 애통해 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불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교황 성하. 하느님 당신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정의로 우리의 궁핍한 처지를 돌보아 주십시오.

우리 중 일부는 장애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 명씩 한 명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의 자녀들 사이에는 어떠한 차등도 없을 테지만, 이 땅에서는 사람이 사람에게 등급을 매겼습니다. 그 등급에 따라 활동보조인의 적절한 도움을 받을 방법이 사라졌습니다. 화재 현장에서 불에 타 죽은 이가 있습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소중함을 알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이 죽음과 마찬가지여서, 죽는 길이 사는 길이어서 교회에서 말하는 크나큰 죄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장애인에게 등급을 매기는 저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더 큰 등급을, 비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또 다른 등급을 매기는 자들입니다. 교황 성하. 저들에게 끊임없이 주었던 그리스도의 실천적인 사랑을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 중 일부는 일터에서 쫓겨났습니다. 광화문의 높은 빌딩에 자리를 잡은 투기 자본과 대기업의 탐욕은 식구를 먹여 살리는 가장이거나 자립을 이제 막 시작한 여성노동자거나 가리지 않고 집어삼켰습니다. 연대성의 원리에 기반해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만든 노동조합을 해체하려고 합니다. 케이블방송과 인터넷을 설치, 송출, 수리하는 노동자들이 한창 일해야 할 일손을 놓고 뙤약볕 아래 거리에 나와 노숙을 하고 있습니다. 교황 성하. 희망이 들어설 틈이 없어 절망하고 있는 저희에게 손을 내밀어 거리에서 함께하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교황 성하. 우리와 함께 울어주십시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들과 다 겪은 후에야 끝나게 될 우리의 시련을 위해 울어주십시오. 우리와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성하께서 집전하시는 미사를 치장한다는 이유로 저들이 우리를 광장에서 쓸어내는 일이 없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를 찾아와 주십시오. 익숙해지지 않는 우리의 고통을 위로해 주시고 길거리에 나와 탄원하는 방법밖에 찾지 못한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리를 몰아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멈추지 않는 분노를 깨끗이 용서해 달라고 우리 주님께 청원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와 함께, 또한 교황 성하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2014년 8월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농성 중인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장애인∙빈민∙
케이블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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