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이 비가 솔솔 오는 날에는 그냥 올라가요. 잠깐 감전이 될 때도 있어요.”

목장갑 속에는 일회용 비닐장갑이 있었다. 케이블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 김인규(가명)씨는 씩 웃으며 전신주를 천천히 올라갔다. 족히 5m가 넘어 보였다. 장대비가 지나간 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40대인 김씨는 경기도에 위치한 한 하청업체에서 케이블TV 설치 및 전선 유지보수, 철거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노동자다. 설치 따로 유지보수 따로 인력을 두기도 하지만, 김씨는 모든 업무를 다 맡고 있다. 그는 15년 경력을 가진 베테랑이다.

   
▲ 케이블하청업체 노동자 김인규(가명·40대)씨가 24일 비가 오는 날에도 전주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그를 간접고용한 원청업체 씨앤앰(C&M, 케이블SO)은 최근 수도권 협력업체 18곳 가운데 14곳을 폐쇄했다. 3곳은 계약해지 됐으며 1곳은 이달 말로 씨앤앰과의 계약이 종료된다.<기사링크> 김씨의 회사는 계약해지된 3곳 가운데 하나다. 오는 31일부로 근로계약이 파기된다.

그를 만난 24일, 김씨는 일하는 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오늘은 일정이 괜찮은 편이네요”라는 말뿐, 해고나 다름없는 ‘계약해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 일만 했다. 그가 담당하는 지역은 주로 농촌이다. 그가 있는 지역의 전신주는 낡았고, 농촌 특성상 판넬로 지은 집이 다수기 때문에 언제 불상사가 생길지 모른다. 9시 40분께 시작된 오전 첫 일정도 시내에서 차로 30분 달려야 할 만큼 한참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다.

   
▲ 김인규씨가 전주 작업에 앞서 목장갑을 착용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김인규씨가 전주 작업에 앞서 안전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오늘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다들 전주(電柱, 전신주) 작업을 꺼려요. 자칫하면 감전될 수 있거든요. 그래도 솔솔 내리면 조금씩 일을 해요. 잠깐 잠깐 감전되는 부분도 있지만. (웃음) 고객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못하겠다고 할 순 없으니까.”

여름과 겨울 가운데 어느 계절이 더 일하기 어려운지 물었다. “아무래도 여름이 어렵죠. 장마가 되면 낙뢰 위험이 있고요. 홍수 같은 걸로 전주가 무너지기도 하고. 제가 더위를 잘 못 참아요.” (희망연대노동조합 케이블방송비정규직지부 설문조사를 보면, 씨앤앰 소속 비정규직 직원 250명 가운데 90.8%가 통전을 막아주는 절연화를 받아본 적이 없었고, 70.8%가 절연장갑을 지급 받아보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 케이블하청업체 노동자 김인규(가명·40대)씨가 24일 비가 오는 날에도 전주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안전모, 안전화, 그리고 안전벨트. 김씨는 최소한으로 갖추어야 할 장비만 가지고 전신주를 오르기 시작했다. 안절벨트에 걸린 줄은 전신주를 축으로, 거리를 조정하는 데 쓰였다. 그는 목장갑으로 낡은 선을 교체한 뒤 새로운 케이블을 연결했다. 그러나 곡예를 하듯 전신주를 오르내리는 베테랑 김씨도 3번이나 떨어진 적이 있다고 했다. 장비에 대한 원청의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도급비는 오르지 않고, 하도급 쥐어짜기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원청은 협력업체 등급을 매겨요. S급이라고 1등급을 받으면 1000만 원을 주는 식이죠. 그런데 웃긴 건 뭔 줄 아세요? 그 1000만 원은 꼴등한 협력업체의 기존 몫에서 떼어 와요. 말 그대로 하도급 쥐어짜기죠.”

   
▲ 케이블하청업체 노동자 김인규(가명·40대)씨가 24일 비가 오는 날에도 전주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전신주 작업이 끝나고 찾은 곳은 작고 허름한 빌라. 몸을 힘겹게 가누는 노(老) 부부 집이었다. 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김씨는 “세 번째 방문”이라고 했다. “TV 옆에 있는 기계의 파란불은 끄지 마세요.” “TV 로고 나오면 외부입력 한 번 더 누르시고.” “안 되시면 전화를 주세요.” “세 번이나 왔는데 왜 못 알아보세요.” 그는 노인의 말벗이 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노인 분들이 많아요. 좋은 점은 있어요. 도심엔 일부 깐깐한 고객들이 있잖아요. ‘기사한테서 땀 냄새가 난다’ ‘지저분하다’는 식으로 약간 불편하게 보시는 분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게 적어요. 아파트라도 문을 열면 논이고 밭이니.(웃음) 옷이 더러운 게 오히려 자연스럽죠.”

A/S를 하러 온 직원에게 덧신이나 비닐 양말을 따로 준다거나 직원이 걸어 다닐 때마다 뒤에서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는 등의 경험담은 케이블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농담처럼 주고받는 얘기다.

   
▲ 김인규씨가 24일 경기도 한 노 부부 빌라에서 A/S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6천원짜리 부대찌개가 점심 메뉴였다. 그의 휴대전화 알림음은 점심 식사 때도 멈출 줄 몰랐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자마자 그는 차에 탔다. 엑셀러레이터를 더욱 세게 밟았다. 업무가 왜 이렇게 빡빡한 것인지 물었다. “업무량이 지나치게 과다해서 사람들이 많이 떠났어요. 제가 담당한 곳만 해도 5명에서 3명으로 줄었고, 노조가 생겨서 그렇지 예전에는 야근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협력업체의 압박이 심했어요.” 김씨가 속해 있는 희망연대노동조합 케이블방송비정규직지부는 지난해 설립됐다.

“노조가 생긴 이래로 영업 압박이 확실히 줄어들었어요. 예전엔 하루 10가구를 방문해 설치를 한 뒤, 남은 7가구 가운데에서 3~4가구도 야근해서 더 설치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5시 반 정도에 일을 마치고 못한 일은 다음날 일정으로 잡고 있죠.”

현재 케이블방송비정규직지부 노동자들은 74명이 해고된 상태고, 500여 명이 직장폐쇄로 거리로 내앉았다. 김씨의 협력업체 노동자 40여 명도 갈 곳을 잃었다. 새로 인수할 업체가 누구인지와 고용승계 여부가 불분명한 상태다. 사실상 씨앤앰이 ‘전체 고용 승계’를 거부하고 있어 이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 상태다.

   
▲ 김씨가 24일 오후 전주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씨앤앰은 방문판매조직(이하 방판)을 확대하면서 지역별 독점권을 가지고 있던 협력업체를 압박해 왔다. 명목은 경쟁이지만 대체인력으로 협력업체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이다. “원청이 방판으로 협력업체의 수입을 압박하고 있는 상태예요. 이들도 설치를 담당하긴 하는데, 굳이 디지털TV로 바꾸지 않아도 될 것을 소비자에게 억지로 바꾸게 해요. 안 바꾸면 TV가 안 나온다고 거짓말하면서. 어르신들이 그 말뜻을 알까요? A/S를 미룬다든지 아니면 엉망으로 고친다든지 얘네가 저지른 것들은 우리가 수습하고 있어요.”

김씨는 7월 말부터 서울 광화문 파이낸셜빌딩 앞에서 씨앤앰 대주주 ‘MBK파트너스’와 ‘맥쿼리’ 규탄농성에 참가한다. 그동안은 서울을 오가며 연대를 했지만, 지금은 노숙 농성을 각오할 만큼 절실하다. 

“파업 연대를 하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지역 사회와 연대하는 방법을 몰랐는데 서울은 그걸 정말 잘하더라고요. 뜻 있는 시민단체와도 연대하고. 조금씩 깨달아요. 우리 목소리를 스스로 내야 한다는 걸. 소방의용대 활동은 해봤지만.(웃음)”

몇 마디 나누던 그는 다시 사다리를 펴고 안전 도구를 장착한 뒤 전신주에 올랐다. 오전에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뙤약볕이 내리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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