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8일 첫 공판준비기일을 시작으로 6번의 준비기일과 37번의 공판이 열린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재판이 지난 14일 결심공판을 끝으로 이제 1심 선고만 남았다.

검찰은 결심공판에서 국가정보원법과 공직선거법을 위반해 국정원 직원들에게 정치·선거개입을 지시한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징역 4년과 자격정지 4년을 구형했다.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과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은 원 전 원장과 공모한 혐의로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구형받았다.

물론 검찰 구형이 곧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정치관여 혐의를 확정하는 것은 아니다. 원 전 원장 등의 심리를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는 지난 2월엔 공직선거법 등의 위반으로 징역 4년을 구형받은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김 전 청장의 혐의를 확인하기 위해 공판에 출석한 증인 중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김 전 청장에게 유리한 진술을 했던 것에 반해, 원 전 원장 등에 대한 공판에서 검찰은 혐의를 입증할 상당수 핵심 증언들을 확보했다.

아울러 검찰은 매월 원 전 원장이 주재한 전부서장 회의 녹취록과 국정원 내부 전산망을 통해 전 직원들에게 공유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을 증거로 원 전 원장이 공무원으로서 정치적 중립 의무를 어기고 정부·여당에 유리하도록 정치에 관여했다는 것도 확인했다. 또 지난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사이버 심리전단을 확충해 여론조작 활동을 펼쳤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 원세훈 전 국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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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유죄 이유 ①국정원 직원의 행위는 명백한 불법

재판부가 검찰이 제출한 증거를 받아들여 유죄를 선고하는 데 핵심적인 쟁점 근거가 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심리전단 직원들의 행위가 국가정보원법과 공직선거법을 위반했는지 여부이다.

원 전 원장 측 변호인은 “북한의 사이버상 왜곡 선전·선동에 대응하는 활동을 정치관여와 선거개입으로 힐난할 수 없고, 이는 국가안전보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정원의 정당한 업무집행”이라고 항변하고 있지만, 국가정보원법 제9조(정치 관여 금지)에서는 국정원 원장을 비롯한 전 직원들이 직위를 이용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지지 또는 방해 행위를 금지하며 동법 제18조에 따라 엄격히 처벌하고 있다.

그러나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은 사이버팀 활동을 도와주는 외부조력자들과 함께 ‘오늘의 유머(오유)’와 ‘보배드림’ 등 인터넷 커뮤니티를 모니터링 하면서 다수의 아이디를 공유해 매일 하달된 이슈 및 논지에 따라 글을 작성하거나 조직적인 찬반클릭 여론조성 활동을 했다.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은 법정 진술을 통해 오유 등에 안철수·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에 대한 비방 글을 작성했다고 시인했다. 이아무개 심리전단 3팀 5파트장은 ‘안철수는 문재인을 밀어주고 해산했으면 뻔한 거 아냐’, ‘정희 언니 대선에 출마한다는 뉴스 듣고 XX 웃었다’는 글 등을 게시했고, 일명 ‘국정원 오피스텔 댓글녀’로 알려진 김하영(30) 직원은 지난 대선을 앞두고 이정희 당시 통합진보당 후보의 ‘남쪽 정부’ 발언을 비판하는 글을 작성하기도 했다.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은 트위터를 통해서도 박근혜·문재인 지지비방 글뿐만 아니라 당시 안철수 무소속 후보와 이정희 진보당 후보를 비판하는 트위터 글을 광범위하게 작성했다.

이들이 트위터에 작성하거나 리트윗한 글들을 보면 “종북인증 발찌 찬 문재인”, “문재인은 정말 대한민국의 문제人”, “문재인의 주군은 노무현 대통령이 아니라 김정일”, “문재인 후보는 사퇴해야 합니다,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고 뻔뻔하게 대통령 후보가 되어~”, “박근혜 후보 후원계좌 안내 대선승리로 가는 큰 힘이 됩니다” 등으로, 검찰이 최종 정리한 것만 해도 국정원 직원들이 계정 1157개를 사용해 작성한 선거·정치 관련 트위터 글은 78만여 건에 이른다.

원세훈 유죄 이유 ②‘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은 직무상 구체적 지시

원 전 원장이 유죄일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이 같은 불법 정치관여·대선개입 행위를 직접 지시했기 때문이다. 검찰이 공개한 전부서장회의 녹취록과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에 따르면 원 전 원장은 “국민이 원하는 쪽으로 우리가 일하는 게 맞다. 국민의 의사가 많이 반영된 게 여당이다. 부서장들은 이 정권밖에 더 하겠어요, 다음에 이 정권 빼놓고 길게 할 거 같아요”(2009년 11월 20일), “이제 총선도 있고 대선도 있고, 종북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 가지고 어떻게 해든지 다시 정권을 잡으려 그러고…야당이 되지도 않은 소리를 하면 처박아야지. 금년에 잘못 싸우면 우리 국정원은 없어지는 거야”(2012년 2월 17일) 등 국가안보와 관련 없고 여당을 위한 활동까지도 국정원 임무라고 지시했다.

이에 대해 원 전 원장은 “일반적인 얘기를 한 것이지 구체적으로 지시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2009년 6월 19일 전부서장 회의에서 ‘김대중 정권이 햇볕정책을 실시한 결과 북한의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이어졌다’는 내용의 안보교육 자료를 군대와 학교에 배포하도록 직접 지시했다고 인정했다는 점에서 전부서장 회의 내용이 직무상 지시가 아니라는 말을 스스로 부인한 셈이다.

원 전 원장 등의 유죄를 입증하는 또 다른 근거는 사이버 여론조작 업무를 실제로 수행했던 심리전단 직원들이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과 전부서장 회의 내용을 업무에 반영해야 하는 중요 지시사항으로 인지하고 이를 토대로 이슈 및 논지를 작성했다는 증언이다. 또한 직원들은 이에 대한 활동 결과를 지휘체계에 따라 국정원장에게까지 보고했다. 이는 국정원장-차장-국장-팀장-파트장-직원으로 이어지는 공모관계가 성립됨을 의미한다.

   
▲ 지난해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답변하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왼쪽 상단)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오른쪽은 시민들의 촛불집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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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유죄 이유 ③국정원 직원들 원장 지시에 따라 업무수행 시인

이아무개 전 국정원 심리전단 안보5팀(트위터팀) 팀장이 지난 4월 29일 공판 증인으로 나와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이 업무에 반영된다’고 검찰에서 진술한 것을 인정하며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은 업무에 반영될 정도로 중요해서, 민병주 단장이 원내 공지사항에 공지가 됐다고 알려주면 숙독하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김하영 직원의 동료인 황아무개 직원도 지난해 원 전 원장에 대한 공판 증인으로 출석해 “심리전단 사이버 활동은 전부서장 회의 등에서 원장이 지시하거나 강조한 내용을 중심으로 ‘금일 이슈 및 대응 논지’를 작성한 다음, 팀장·파트장 등 지휘 라인을 거쳐 직원들에게 시달된다. 그러면 직원들은 이에 따라 각자 맡은 사이버 공간에서 글 게시 등 활동을 하고 결과를 보고하는 식이냐”는 검찰의 질문에 “지시를 받아서 글을 쓰고, 그에 대한 결과도 보고했다”고 말했다.

상식적으로 봐도 국정원이 국내 정치와 여론에 무분별하게 관여하며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정황이 분명함에도 오는 9월 11일로 예정된 1심 판결에서 과연 법원이 김용판 전 청장 재판과 다른 판단을 내릴지는 미지수다.

박주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은 15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원세훈 사건은 김용판 사건과 달리 오유나 트위터 작성 글들이 있고, 국정원 직원들도 이를 부정하지 않은 사실관계가 있어 완전 무죄를 내리긴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김용판에게 무죄를 판결한 재판부의 성향을 볼 때 검찰이 원 전 원장의 선거에 영향을 미칠 의도를 의심의 여지 없이 충분히 입증하지 않으면 공직선거법 위반은 무죄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국정원 댓글 사건 당시 민주당 측 고발 대리인을 맡았던 이광철 변호사는 “이범균 재판장은 김용판 사건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내부 제보자(권은희 전 수사과장)의 진술을 양적으로만 비교해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내려서 원세훈 재판도 걱정된다”며 “원 전 원장이 지시·강조 말씀을 매우 오랜 기간 거쳐서 했고, 본인도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을 인정해 당연히 유죄 판결을 내려야 하지만, 이번에도 무죄를 선고한다면 재판부가 비겁하거나 용기가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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