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 히데오 소설 <남쪽으로 튀어>는 자본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 이야기다. 소설은 초등학교 6학년 우에하라 지로의 눈으로 지역(오키나와) 주민을 몰아내고, 리조트 호텔 건설에 눈 먼 자본과 어른의 세계를 그려낸다. 일본에 편입되기 전 오키나와 지역을 지배했던 류큐 왕조에 반대 깃발을 쳐들었던 영웅 ‘아카하치’, 그의 후손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벌이는 투쟁은 퍽 유쾌하다.

그러나 소설은 큰 울림을 주지 못했다. 이유는 현실 자본은 소설이 그리는 것처럼 아둔하지 않으며 자본에 저항하는 이들이 소설 속 중심인물인 지로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만큼 괴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뉴스에서 보았듯 밀양 할매들은 뙤약볕 아래 마른 고추처럼 배짝 곯았다. 그런데도 공권력은 그들을 처참하게 밟았고, 그 앞에서 승리의 브이를 그리며 ‘점령’을 자축했다. 우리네 현실은 소설이 아니다.

   
▲ ‘섬과 섬을 잇다’. 이경석 이창근 유승하 희정 김성희 하종강 마영신 이선옥 김홍모 김중미 김수박 서분숙 박해성 연정. 한겨레출판.
 

밀양의 기억이 금세 사라질까 두려워 책을 찾았다. 헛헛한 마음을 채워줄 책이 없을까 고심하던 끝에 한겨레출판 신작 <섬과 섬을 잇다>에 눈길이 갔다. 앞서 말한 밀양 송전탑을 포함해 쌍용자동차, 코오롱, 현대차 비정규직, 콜트‧콜텍, 제주 강정마을, 재능교육 등 10년 넘게 첨예한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현장 소식을 담은 기록이다. 외딴 섬처럼 고립된 장기 투쟁 사업장을 하나로 연결해 보자는 기획, 일명 ‘섬섬 프로젝트’ 일환으로 나온 르포르타주다. 섬섬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르포작가 이선옥은 머리말에서 답한다.

“철탑 위의 노동자와 밀양의 산을 지키는 노인의 삶이 둘이 아니며, 부평 기타공장의 노동자와 강정마을을 지키는 아이의 삶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 땅에 함께 살고 있는 한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점을 놓쳐 고립된 이 작은 섬들을 다시 ‘우리’ 안으로 이어보려 합니다. ‘섬과 섬을 잇다’라는 공동작업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책 제목이 되었습니다. 섬섬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의 바람은 소박합니다. 우리의 작업이 막강한 권력을 이길 만큼 큰 힘은 없다 하더라도, 장기투쟁 현장의 노동자와 주민에게 작은 울타리가 되는 것입니다.”

<섬과 섬을 잇다>는 땀으로 범벅된 기록만이 아니라 만화를 통해서도 장기 투쟁 사업장 8곳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김성희, 김수박, 마영신 등 만화작가도 이 프로젝트에 함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밀양 다음으로 손이 닿은 챕터는 콜트‧콜텍 이야기였다. 악기제조업체 ‘콜텍’ 노동자들은 지난 12일 해고무효확인소송에서 패소했다. 7년 동안 계속된 법정싸움이었다.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고등법원 논리를 수용하며 콜텍의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콜텍악기) 대전공장의 손실이 회사 전체 경영악화로 전이되고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대전공장 채산성 악화는 향후 개선될 가망이 없어 보인다. 공장폐쇄는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장래에 올 수 도 있는 경영상 위기’를 근거로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이었다. ‘긴박한 경영상 이유’라는 정리해고 조건을 명시한 근로기준법 제24조를 무시한 판결이자 정리해고가 언제든 가능하다는, 법원이 기업에 내린 ‘면죄부’이기도 했다.

콜텍악기 노동자 투쟁에 주목했던 이유는 지난한 투쟁 속에도 이들이 준 감동과 유쾌함에 있었다. 그것은 ‘복마전’ 같은 사회를 살아가게 만드는 한줄기 희망이었다. 지역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똘똘 뭉쳤던 소설 속 지로와 친구들 모습처럼, 소설 같은 현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이들이 콜트·콜텍 노동자들이었다.

“2011년 연말을 지나며 콜텍악기 해고자들은 사고를 하나 쳤다. 평균 나이 50대. 평생 기타를 만들기만 했지 한 번도 연주해본 적 없는 아저씨들이 덜컥 밴드를 만든 것이다. 이름은 ‘콜밴’. 기타 2개, 베이스, 까혼으로 이뤄진 단출한 4인 밴드다. 소셜 펀치로 모금을 해서 초기 결성 자금을 모았고, 그 돈으로 강사를 구하고 악기상을 돌아다니며 기타를 샀다. 매주 모여 두어 달 연습을 하고 급히 데뷔 무대에 섰다. 안 틀리면 이상한 아마추어 해고자 밴드 콜밴은 사람들에게 정겨운 웃음을 줬다.”

“국제 악기쇼가 열리는 독일, 미국, 일본을 찾아 콜트악기의 실상을 알렸고, 국내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콜텍) 박영호 사장을 쫓아가 만나기도 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오로지 박영호 사장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시위를 하고 호소하는 일은 현지 교민들과 노동자들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한국 교포들뿐 아니라 각국의 노동자들과 뮤지션들은 콜트콜텍 노동자를 위해 함께 싸워주었다.” (<섬과 섬을 잇다>, P.159~160)

   
▲ 2009년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해외원정투쟁(사진 = 콜트콜텍 + 문화행동)
 
RATM의 톰 모렐로(Tom Morello)가 연대의 공연을 해주었고, 세계적인 뮤지션 잭 델라 로차(Zack de la Rocha), 그룹 오조매틀리(Ozomatli)는 콜텍‧콜트악기 노동자를 위해 자기 무대를 빌려 줬다. 한국 뮤지션 신대철, 한상원, 최이철, 시나위, 게이트플라워즈도 콘서트 <기타 레전드, 기타 노동자를 만나다>를 통해 연대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콜텍 해고노동자가 보여준 원정투쟁은, 고립된 작은 섬이 음악으로 전세계와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편의 영화였다.

<섬과 섬을 잇다>은 해답을 내려 주는 책은 아니다. 다만 부제 ‘여전히 싸우고 있는 우리 이웃 이야기’처럼 정당한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 이들이 ‘악마’가 아니라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이라는 걸 차분하게 읊는다. 해답은 독자에게 있을 듯하다. 노동자를 보호하지 않는 법, 노동자를 소모품으로만 취급하는 기업, 국익이라는 명분으로 제주 강정, 밀양 같은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본. 같이 살기 위해 이에 맞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지 먼저 책을 읽고 판단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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