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태는 길환영 사장의 보도간섭과 청와대의 보도·인사개입에 1차 책임을 묻고 있지만 그것은 출발점이지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청와대와 KBS와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오래 전부터 지배구조를 바꿔 청와대와 KBS의 관계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KBS의 미래를 고민하겠다”(권오훈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장, 지난 23일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기자회견)

길환영 KBS 사장이 사면초가다. KBS노동조합(위원장 백용규·KBS노조)과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본부장 권오훈·KBS본부)가 사상초유의 동시 파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길 사장에게 더 큰 위기는 양대 노조 뿐 만 아니라 KBS 사내 간부들 중 300여명이 길 사장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뉴스는 파행을 거듭하고 있고, 방송 전체가 멈출 위기에 놓였다.

이처럼 KBS 구성원 대다수가 길환영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KBS의 시청자였던 세월호 유가족들이 KBS 앞에서 항의 농성을 벌였고 다른 시청자들도 등을 돌렸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부동의 1위였던 KBS의 신뢰도가 10%p 가까이 추락해 JTBC에 밀렸다. KBS 구성원들의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졌다.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 지난 9일 기자회견 등을 통해 “길환영 사장이 청와대만 보고 가는 사람”이라 했고, 길 사장의 보도간섭과 청와대의 보도·인사개입을 폭로했다. 공영방송 KBS는 김 전 국장의 폭로로 국영방송으로 전락했다. 간부들이 잇따른 보직사퇴 선언을 통해 “지금이 KBS의 가장 큰 위기”라고 말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KBS와 정치권과의 관계 정립에 대한 논란은 꽤 오래된 얘기다. 김인규 전 KBS 사장은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특보를 지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이후 KBS 내 보도공정성은 붕괴됐다. ‘땡전방송’ 시절로 회귀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 지난 22일, 제작거부 중인 KBS 기자협회가 KBS 신관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문제는 길환영 사장이 물러난다고 해서 KBS의 이 오랜 적폐가 해소될 수 있냐는 것이다. 앞서 권오훈 본부장의 말처럼 KBS 내부 구성원들도 길환영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지만 길 사장의 퇴진만으로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제 역할을 찾아갈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배구조 개선, 필요는 하지만…

KBS는 공영방송으로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공감대는 형성돼 있다. 하지만 현재 KBS는 정치권의 민감한 변화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KBS 사장을 임명하는 이사회 구성부터 여당·대통령 추천 7명과 야당 추천 4명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방송장악을 할 마음도 없고 할 수도 없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다르다.

KBS의 문제점이 불거질 때 마다 바로 이 지배구조개선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현 구조로는 길환영 사장이 물러난다고 해도, 후임 사장 역시 정치권의 입김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배구조개선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개선의 핵심은 KBS 이사회의 구성과 사장선임 방식에 있다.
일각에서는 이사회 여야 구성을 동수로 맞추자는 제안도 나오고 이것이 쉽지 않다면 여권에 이사 추천을 더 할당하되 6:5정도의 균형을 맞추자는 제안도 나온다.

아예 사장 선임과정을 정치권으로부터 배제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최근 한겨레 기고를 통해 “무보수 명예직인 방송의원들이 모인 가칭 ‘방송의회’를 구성해 공영방송사 사장에 대한 인사권을 방송의회에 넘겨주자”며 “방송의원 규모는 사회 각계를 대표하고 외부 압력과 로비를 거의 무의미한 수준으로 만들 수 있게끔 수천명으로 하고 선출은 완전 자유경쟁 공모제로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또한 KBS 이사를 현행대로라면 여야가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어 있는데, 이를 아예 국회의 권한으로 가져오자는 방안도 나왔다. 국회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떠나 일단 국회가 민의를 대변하는 기관인 만큼 대통령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국회가 임명하는 것이 공영성 취지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특별다수제 도입’도 제안됐다. 이사회의 재구성이 어려울 경우 이사회에서 사장 임명과 같은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과반 이상의 찬성이 아닌 2/3이상의 찬성을 확보해야 안건이 통과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추혜선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은 “지금 KBS 사태는 최악의 사장을 퇴진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물론 그것만이 해법이 될 수는 없다”며 “KBS 이사의 수를 여야 동수로 맞추거나 사장 선임과 같은 주요 안건에 대해서는 이사회에 특별다수제를 도입하는 것 등을 제안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방과 교수는 “완벽한 것은 없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아이디어는 나와 있다”며 “김인규 전 KBS 사장이나 구본홍 전 YTN 사장처럼 대선 후보와 관련된 일을 했던 인물들이 사장으로 오는 것은 원칙적으로 막는 등 자격요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공영방송의 이사를 국회에서 결정하자는 것도 제안되고 있다”며 “사실 이사회 구성이 여야 동수가 되면 효율적이겠는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최근에 나온 특별다수제가 의미 있는 제안”이라며 “모든 사안에 대해 적용할 수 없지만 사장 추천 등 중요한 결정은 특별다수제를 통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여권’이다. 비단 새누리당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배구조개선에 대한 얘기는 오래전부터 나왔지만 칼자루를 쥔 여당들은 이 문제에 소홀했다. 굳이 KBS를 정치적으로 독립시켜봐야 손익계산이 맞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KBS 지배구조 개선 등의 내용을 담은 방송법 개정안이 제출되었지만 새누리당은 줄곧 ‘특별다수제’나 ‘종편의 노사 동수 편성위원회’ 등 핵심내용을 반대했고, 새정치민주연합은 이에 무력했다.

김창룡 인제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어느 집권당이 KBS 이사회 구성을 여야 동수로 만들겠나”라며 “그것 보다는 범국민 이사추천위원회를 만드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강준만 교수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내용이다. 김 교수는 “여야가 다 손 떼고 학계나 언론계, 시민단체 등에서 방송독립에 의지가 있는 사람으로 구성해 무보수 명예직으로 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집권여당이 그런 방안에 대해 동의할 수 있을지는 역시 불투명하다. 이처럼 지배구조개선은 KBS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쉽게 나오는 해법이지만, 집권여당의 ‘결심’이 서지 않는 이상 관철시키기는 오히려 가장 어려운 방식이다. KBS에서 보직을 사퇴한 간부급 인사는 “정치권에서 사장선임구조를 바꿔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내부 혁신 없이 공영방송도 없다

만약 지배구조 개선이 이루어져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했을 때, KBS는 공영방송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쉽지 않아 보인다. KBS 내부 구성원들이 길환영 사장의 퇴진운동에 나섰지만 사실 길환영 체제를 받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내부 구성원들이었다.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길환영 사장의 퇴진을 촉구하며 사태가 커졌지만, 김시곤 전 국장 역시 불공정보도의 책임을 안고 있다. 용산참사를 ‘사건’으로 쓰라는 지시나, 박근혜 정부의 기초연금 공약 파기를 ‘수정’으로 고치라는 지시는 매우 정파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보도본부 부장단이 보직을 사퇴하며 길환영 사장의 퇴진을 촉구해 많은 호응을 얻었지만 부장들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KBS 33기 기자들은 “불이익을 감수한 자기희생에 감사하다”면서도 “‘왜곡된 9시 뉴스’의 얼개를 꾸린 것은 그 선배들”이라고 지적했다.

오성일 KBS 수신료현실화추진단 팀장은 사내 게시판에 올린 글을 통해 “사장이 ‘좋은 의견’이라고 전달했다는 그것들이 공교롭게도 권력에 이롭거나 정부의 부담을 줄여주는 방향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며 “KBS 뉴스는 이미 권력에 대한 비판에는 충분히 신중해 왔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전임 보도본부장, 보도국장은 물론 보직을 사퇴한 부장단들도 반성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KBS의 한 중견급 기자는 “길환영 사장이 나가도 지금의 보도국 문화와 보도국 구성원이 그대로 있는 한 KBS보도가 극적으로 달라지기는 어렵다”며 “공정보도를 위해선 기자 개개인의 양심이 기사에 가장 잘 발현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보도본부장이나 보도국장이 청와대로부터 외압을 받을 때, 보도국 내부에서 기자들의 양심을 모아 간부들에게 내압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이어 “우리에게 필요한 장치는 보도국장 직선제일 수 있고 중간평가제일 수도 있다”며 “가장 핵심적인 것은 편집권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장치”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편집권에 대한 일상적 감시를 위해 편집회의 속기록을 작성·공개하고 전날 편집에 대한 내부평가를 진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KBS의 한 젊은 기자도 “여태껏 뉴스편집부의 판단에 피드백하거나 평가할 수단이 없었다. 기자들이 열심히 리포트를 만들어도 <뉴스9>가 어떤 아이템을 톱으로 만들고 어떤 아이템을 어떻게 블록화 할지는 편집부가 판단한다”며 “이에 대한 아래로부터 평가는 지금껏 없었는데 편집부에서 중요한 아이템을 뒤로 빼면서 장난을 치고 있는 상황을 평가할 수 있는 내부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제도적 장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KBS 내부 구성원들의 변화다. 사장 뿐 아니라 KBS 간부들도 권력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경욱 KBS 앵커가 청와대 대변인으로 향한 것은 상징적이다. 김창룡 교수는 “공영방송 앵커나 정치부장, 해설위원 등은 정치권과 연결되어 있다”며 “사장만이 문제가 아니라 정치권이 부르면 뛰어갈 간부들이 즐비하다”고 말했다.

김재영 충남대 교수(신문방송학)는 “결국 내부종사자들이 제 역할을 지켜야 한다”며 “지금은 언론인이란 의식보다 직업인이란 인식이 사회적으로 팽배하고 소명의식이 적어졌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중요한 것은 제도가 아니라 공영방송에서 가동돼야 할 시스템이 가동될 수 없다는 것”이라며 “아무리 외부에 있는 사람이 의지나 뜻이 있어도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에 주도권을 쥐고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은 내부 종사자들”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길환영 사장에 대해 전 구성원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은 고무적이다. KBS의 간부급 인사는 “예전에는 본부노조만 파업을 하고서 끝나고 들어가면 같은 일상이 반복됐지만 이번엔 제1노조의 파업결의로 과거와 다를 것 같다”며 “길 사장이 물러날 경우 과거의 파업과 달리 승리하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자나 PD들이나 기가 꺾이지 않고 KBS를 새로 조직해나갈 가능성이 있어 기대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가 KBS 언론인들에게 준 영향이 굉장히 크다”며 “앞으로 현장에서 좀 더 저항할 여지도 크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사람’

KBS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지배구조가 바뀐다고 해서 부작용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 내부 구성원들이 보도나 편성에 더 깊게 개입하는 것도 중요한 방법이지만 이를 관철시키는 것도 쉽지 않다. 공정한 지배구조개선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이를 어떻게 운용하는지도 문제다. 운용은 결국 ‘사람’의 문제다.

김재영 충남대 교수는 “KBS의 본질적 문제는 제도가 아닌 것 같다”며 “그것은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이지만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달라질 것이라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배구조 개선의 핵심은 정치권과의 고리를 끊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김중배 전 MBC 사장이 ‘절차적 민주주의는 갖추어졌으니 앞으로 중요한 과제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고 말했지만 현재 정치권의 방송 개입은 5공 시절에나 볼 수 있던 것”이라며 “결국 방송의 공적영역은 확실히 다지고 가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공영방송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며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정치권도 함부로 넘보지 못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는 “지금 KBS 간부들이 보여준 행태는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정파적·정치적이라는 것”이라며 “지금 젊은 층에서 문제제기하는 사람들도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언론으로서의 가치를 못 갖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때문에 젊은 층에 대한 기대가 있다”며 “KBS 내 젊은 기자, 젊은층에 기회가 갈 수 있는 제도적 변화가 답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 관행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만약 길환영이 퇴출되었을 때 새 사장이 그에 못지않을 수 있지만 문제가 있으면 퇴출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길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BBC는 제도적으로 우리만 못해도 전통과 경험이 있다”며 “우린 그런 경험을 축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완벽하게 간부진들을 개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하지만 모든 간부들이 그렇지 않다. 생각은 보수적이어도 언론으로서 역할을 알고 지키려는 사람이 충분히 있을 것이고 그들이 전면에 나서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KBS의 한 중견급 기자는 “이번에 보직을 사퇴한 간부들은 길환영의 퇴진과 관계없이 보직사퇴를 번복해선 안 된다”며 “대대적인 세대교체와 인적청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