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에도 ‘영광의 시대’가 있었다. ‘동아투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80·90년대를 대표하는 신문은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는 DJ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날카로운 필봉을 유지하며 ‘야당지’로 명성을 떨쳤다. 1991년 <기자협회보>는 이런 동아일보를 두고 “다른 신문들과 일정한 차별성을 보이면서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2000년대는 MBC의 시대였다. 최승호 PD로 대표되는 은 신화나 다름없던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을 밝혀냈고, 검사와 자본의 유착 관계를 철저하게 파헤쳤다. 삼성그룹과 정치권·검찰의 비리를 폭로한 것도, 한 주 동안 뜨겁던 이슈를 토론의 장으로 옮기고 그것을 안방으로 전달한 것도 MBC였다. 이번 세월호 침몰사고에서 진가를 발휘한 JTBC 손석희 앵커, 고발뉴스 이상호 기자 모두 당시 MBC의 간판이었다. ‘마봉춘’이라는 말은 예능을 넘어, 시민들이 공공의 가치를 구현하는 언론사에 붙인 애칭이었다.

두 언론사는 ‘사주’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91년 8월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은 김중배 편집국장을 경질한다. “체제 부정이나 국민의 위화감 조성에 지면을 할애함은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김중배 국장은 동아일보를 떠나며 “언론은 이제 권력과의 싸움에서, 보다 원천적인 제약 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그 유명한 ‘김중배 선언’이다. 2000년대 초, 중앙 언론사에 대한 DJ정권의 세무조사는 언론계의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김병관 사장의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동아일보와 DJ정권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는다. 규모가 줄어드는 신문 시장과 더욱 치열해진 생존 경쟁 속에서 동아일보의 날카로움은 점차 무뎌졌고 친권력적 성향은 가속화했다. 동아일보는 결국 ‘조중동’의 말석에 앉게 된다.

   
▲ 동아일보 사옥. 사진=이치열 기자
 
MBC는 분명 주인 없는 회사였다. 논란이 있지만, MBC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는 공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공영’방송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성역 없이 권력을 비판할 수 있던 배경이었다. 그러나 MB정권이 들어서자 최고 권력이 ‘사주’를 자처했다. 그의 측근으로 알려진 이들이 MBC에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 최승호 PD, 박성제·이상호·이용마 기자 등 바른 말을 하던 언론인들은 거리로 내앉아야만 했다. 이들의 마이크를 불편해 하는 세력은 ‘좌파방송’이라는 낙인부터 찍었다. 공기(公器)가 흉기로 망가지면서 어느덧 국민은 마봉춘이라는 말 대신 ‘엠빙신’이라는 조롱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민영방송 SBS에 밀린 MBC는 지상파 방송 3사의 말석에 서게 됐다.

주인이 없든 있든 언론은 권력에 취약하다. 정치·자본 권력의 신장과 성장의 궤를 같이한 한국 언론의 태생적 한계다. 동아일보와 MBC는 자본과 정치권력과의 ‘거리두기’에 실패했다. 그 결과 두 언론사는 서로가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가 됐다. 가장 뾰족했던 두 언론사의 ‘몰락’은 한국 저널리즘의 비극이다. 두 언론사가 ‘영광의 시대’를 되찾을 수 있을까? 동아일보 기자 출신 이강윤 정치평론가는 “권력에 대한 ‘긴장’은 언론이 지켜야 할 보루다. 이 지점에서부터 고민이 시작돼야 한다”고 밝혔다.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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