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로 깊은 슬픔에 빠진 유가족들이 지난 8일, KBS 앞을 찾았다. 사고 초기 정부의 대처에 불만을 품고 실종자 가족들이 청와대로 향한 적은 있으나 진도에서 경찰에 막혔다. 이들이 집단으로 서울까지 특정 기관에 항의방문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KBS에 대한 유족들의 분노는 컸다.

뇌관을 터트린 것은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의 두 가지 발언이다. 지난달 28일 김 전 국장은 오후 뉴스에 검은 옷을 입고 온 앵커를 질타하고 뉴스3부를 찾아가 앵커들에게 “검은 옷을 입지 말라”고 지시했다. 지나친 추모 분위기가 실종자에 대한 희망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취지였다는 것이 KBS 측 설명이나, 국민적 정서와는 동떨어진 지시라 논란이 됐다.

두 번째 발언은 유족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김 전 국장이 보도본부 내 한 부서와의 점심식사 자리에서 교통사고와 세월호 참사를 비교하는 발언을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김 전 국장은 이에 대해 전례 없이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다. 그는 “세월호 참사는 안전 불감증에 의한 사고였고 이를 계기로 안전 불감증 뉴스시리즈물을 기획해 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였다”고 했다.

하지만 해당 발언은 안산 합동분향소에 퍼졌고 유가족들은 분노했다. 지난 8일, 당시 임창건 보도본부장과 이준안 취재주간 등이 안산 합동분향소에 조문을 갔는데, 유족들은 이들을 상대로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어 유족 100여명이 그날 저녁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KBS 앞으로 향했다. 이들은 김시곤 전 국장의 파면과 길환영 KBS 사장과의 면담·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길 사장은 유족들과 만남을 거부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길환영 사장은 “유가족을 만나려고 했으나 외부 사람(사회단체)이 있어 해결기미가 없는 상태였다”며 “순수하게 유가족만 만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결국 KBS 앞에서 농성을 하던 유족들은 임창건 당시 보도본부장, 배재성 스포츠국장 등과 면담했을 뿐이었다.

이처럼 KBS는 초기 강경대응 기조였다. 유족들이 청와대로 향한 지난 9일 오전, KBS는 보도자료를 통해 “조문을 하는 과정에서 KBS 간부가 일부 유족들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하고 5시간가량 억류당했다”며 “(해당 간부들은) 유족들로부터 당한 폭행과 장시간 억류에 따른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라고 밝혔다. 사과보다는 반격의 태도였다.

KBS는 지난 9일 오전 김시곤 전 국장의 발언을 보도한 미디어오늘을 뉴스 화면에 방송하며 ‘왜곡보도’라고 했다. 김시곤 전 국장은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다. “새벽 3시, 6층 임원 회의실에서 사장, 부사장, 임원, 보도본부 국장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 요구는 본부노조의 일방적 주장이기에 정면 돌파하는 것으로 사장이 결정하고 확인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다. 유족들이 청와대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앞에서 농성이 시작되면서 청와대와 KBS는 바쁘게 움직였다. 우선 청와대가 KBS에 압력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은 “청와대가 KBS에 부탁했다”고 말했다.

김시곤 전 국장은 “(9일) 12시 25분, 사장이 면담하겠다는 연락이 와서 6층에 올라갔다”며 “사장은 ‘주말에 대규모 촛불집회가 예정돼 있어 위기국면이다. 기자회견 잘 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고 오후 1시 25분, 사장이 전화로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왔다며 내게 회사를 그만 두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김 전 국장은 이어 “3개월만 쉬면 일자리를 찾아보겠다고 회유했다”며 “그러면서 이걸 거역하면 자기 자신도 살아남을 수 없고, 이건 대통령의 뜻이라고 말하며 눈물까지 흘렸다”고 주장했다.

길 사장도 청와대로부터 연락을 받은 사실을 인정했다. 길 사장은 “BH(청와대)쪽에서 정무, 홍보수석이 오전 중에 만난 것으로 알고 있고 내게 그런 내용이 전달됐다”며 “(청와대가) ‘KBS 문제로 이러저러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매우 사태가 심각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해서 내가 ‘오전에 이미 유족들을 만나기로 해서 그런 뜻을 전달을 했습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서 KBS에서 예정된 오후 2시 기자회견도 그 성격이 바뀌게 됐다. 길 사장은 김시곤 전 국장과의 통화 후 청와대 앞으로 향했고 김시곤 전 국장은 기자회견장에 나왔다. 김 전 국장에 따르면 애초 오후 2시 기자회견은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위원장 권오훈·KBS본부) 측의 주장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김 국장은 자신이 사퇴한다고 했다.

문제는 이 자리에서 김 전 국장이 길환영 사장을 비판하며 퇴진을 촉구했다는 점이다. 길 사장이 보도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이날 저녁, JTBC는 김 전 국장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김 전 국장은 JTBC에 “길환영은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이라며 “권력은 KBS를 지배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지난 9일 열린 김시곤 KBS 보도국장의 긴급 기자회견. 김 전 국장은 이 자리에서 길환영 사장을 비판하며 퇴진을 주장했다. ⓒ 연합뉴스
 
김 전 국장의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길 사장은 청와대 앞 유족들의 농성현장을 방문해 사과했다. 유족들은 김 전 국장의 사실상 퇴진과 길 사장의 사과 후 농성을 풀었다. 하지만 당시 김 전 국장의 폭로 기자회견으로 KBS 사태의 중심은 김시곤 전 국장에서 길환영 사장으로 바뀌게 된다.

김 전 국장의 폭로로 KBS 내부가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KBS본부는 김 전 국장의 폭로에 따라 길 사장에게 김 전 국장의 발언에 대해 공개 질의했다. KBS 기자협회(회장 조일수)는 지난 9일 즉각 길 사장의 퇴진을 요구했고 KBS 노동조합(위원장 백용규·KBS 노조)도 11일 길 사장의 퇴진을 촉구했다. 하지만 길환영 사장은 김시곤 전 국장의 사퇴로 이루어진 보도국장 자리에 <추적 60분> 방송보류 논란을 불러일으킨 백운기 전 시사제작국장을 임명하며 간접적으로 사퇴 거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이것은 또다른 논란을 야기시켰다. KBS노조가 백운기 신임 국장이 임명 하루 전 청와대를 다녀왔다는 차량기록부를 공개한 것이다. 백 국장이 이정현 홍보수석과 친분이 있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이 시점에 백 국장은 허리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길 사장의 수습책이 실패한 것이다.

이에 따라 길환영 사장의 퇴진 압박전선도 더욱 확대됐다. KBS본부는 지난 12일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길 사장에 대한 신임투표를 벌이기로 하는 등 퇴진 투쟁 수순에 돌입했다. KBS노조 역시 비상대책위원회로 전환하는 한편 길 사장 퇴진 운동에 나설 것임을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KBS 기자협회가 13일 투표를 통해 94.3%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제작거부에 돌입하기로 했다.

전선은 청와대로까지 확대됐다. 김시곤 전 국장은 지난 16일 기자협회 총회에 참석해 청와대의 보도·인사개입과 길환영 사장의 보도개입을 추가 폭로했다. KBS본부는 이에 17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 전 국장이 보도에 개입했다고 밝힌 이정현 정무수석의 해임과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침묵하던 길환영 사장이 입을 열었다. 길 사장은 지난 19일 KBS 구성원으로부터 출근을 저지당하고 오후에 출근했다. 이어 KBS 기자협회 총회에 참석하고 일부 언론과 인터뷰를 가지며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길 사장은 김시곤 전 국장의 발언을 전면 부인했다.

KBS 기자협회는 지난 19일 오후 1시부터 무기한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KBS노조와 KBS본부는 21일부터 총파업 찬반투표를 시작하는 등 길 사장 퇴임을 위한 압박에 돌입했다. 앞서 18일, KBS 보도본부 부장단이 보직사퇴를 결정했고, 팀장급, 기술본부 팀장급, 경영직군 팀장도 보직사퇴를 결정했다. 임창건 보도본부장도 사퇴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길 사장은 19일 저녁 신임 보도본부장으로 이세강 보도본부 해설위원을, 신임 보도국장으로 박상현 보도본부 해설위원실장을 임명했다. KBS 기자들의 제작거부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19일 밤, KBS 메인뉴스인 뉴스9는 20분만 방송됐다. KBS의 뉴스는 현재 파행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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