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검찰이 사자(死者)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진 등에 대한 수사를 이례적으로 형사부에서 공안부로 재배당하자, 영화를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를 향한 공안탄압 의도가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당초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지난해 5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씨가 김지영 백년전쟁 감독과 최진아 PD,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사건을 형사1부로 배정하고 지난해 12월부터 피고소인 조사에 착수했다.

지난 2월 11일 김 감독에 대한 형사1부의 3차 조사까지 진행되는 과정에서 검찰 정기인사로 담당 검사가 한 차례 교체됐으며, 이 후 불과 한 달 만에 백년전쟁 관련 소송 사건이 공안1부(이현철 부장검사)로 재배당됐다. 윤웅걸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14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이 사건은 단순히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아니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과 관련한 사건이고, 대한민국 역사와도 관련성이 있어 공안부에서 심층적으로 검토해 보려는 취지”라고 밝혔다.

하지만 통상 검찰 직제에 따르면 공안 제1부는 간첩 등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과 선거사범을 전담하는 부서이다. 때문에 사자명예훼손과 같은 ‘친고죄’(피해자가 고소를 해야 하는 범죄) 사건을 안보·선거사범을 전담하는 공안부서에서 수사하는 것 자체가 전례가 거의 없는 일이라는 게 법조인들의 지적이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민족문제연구소 측 변호인단의 이민석 변호사는 15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사자명예훼손은 고소한 사람이 소를 취하하면 언제든 수사가 종결되는 친고죄인데 선거나 공공의 안녕에 관한 사안을 다루는 공안부에서 조사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며 “공안 수사는 피해자의 고소 여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정부에 큰 위해가 되면 검찰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 하는 것인데, 과연 공안에 친고죄를 적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변호사는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면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선 친고죄 적용이 아닌 독재정권 시절 있었던 국가원수모독죄를 부활해야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엔 그런 규정이 없다”면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강조하고 ‘종북’을 비난하면서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최고 존엄으로 인정해 국가가 친고죄를 공안사건으로 조사하겠다는 것이 북한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검찰이 형사 사건을 공안부로 재배정하면서 조사 방향이 혐의 내용보다 관계자 파악으로 바뀐 점에 대해 이 변호사는 “이 사건은 자료 내용의 사실 여부가 중요한데도 자료를 누가 줬는지 묻는 것은 공안부에서 친고죄로 사상검증을 하겠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며 “사자명예훼손죄가 내심(內心) 의사를 파악으로 것으로 바뀌었을 리 만무한데, 혹시나 민족문제연구소에 참여하는 고문들을 종북 성향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아닐까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이번 검찰 조사 방향과 관련해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백년전쟁 소송 사건이 형사부에서 공안부로 넘어간 것도 석연치 않고 검찰이 내놓은 해명도 전부 앞뒤가 안 맞다”며 “일제강점기 이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한 논쟁이고, 자유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요소조차 파괴하고 독재를 하다가 쫓겨난 대통령에게서 대한민국 정통성을 찾는다는 건 논리와 상식에도 안 맞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본적으로 내용으로 걸 게 없으니까 짜 맞추기 수사를 하기 위해 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이고 연구소에 대한 공격을 통해 백년전쟁 후속편이 나오는 것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라며 “나아가 학계의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에게도 침묵을 요구하면서 위축시키려는 것은 상식을 뒤엎는 공안몰이”라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해 제작한 백년전쟁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다룬 4부작 다큐멘터리로 지난 2012년 11월 1부 ‘두 얼굴의 이승만’과 박정희 경제성장 신화의 허실을 파헤친 번외 편 ‘스페셜에디션 프레이저보고서’가 먼저 공개됐다. 연구소의 발표로는 현재까지 500만 명 이상이 유튜브 동영상 등을 통해 백년전쟁을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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