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노역’ 논란됐던 대주그룹 허재호 전 회장(72)에 대한 감시는 사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그는 지난 4일 광주지검 앞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현금화가 가능한 모든 재산을 팔아 남은 벌금을 내겠다”고 밝혔다. 벌금 254억 원 중 50여억원을 납부했으며 나머지 벌금의 납부계획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태도에 비해 진일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전력으로 볼 때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계획 발표 후 뜨거웠던 여론의 관심이 사라진 뒤에도 ‘계획’ 대로 벌금을 완납할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노역장을 나오면서도 ‘당장 낼 돈이 없다’고 했다가 숨겨둔 재산이 드러나고, 부인에 대한 검찰의 압박이 이어지자 마지못해 ‘찔끔’ 내놓은 것이다. 일단 소나기는 피해한 뒤, 시간을 끌며 상황을 살피겠다는 계산으로 보인다.

   
 4일 광주지검에서 대국민사과와 벌금납부계획을 발표하고 귀가하는 허재호 회장  
 

그는 이런 식으로 버텨왔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법정에서 약속한 ‘광주일보’와 ‘함평골프장’의 공익재단 기부 약속이었다. 그는 2008년 자신의 범죄에 대한 선고를 앞두고, 법정에서 선처해 주면 광주일보와 함평 골프장의 소유권을 기존의 이곡문화재단과 새로운 공익재단을 설립해, 주식을 각각 50%씩 넘기겠다고 밝혔다. 그의 아호를 딴 이곡문화재단에 대한 허회장의 지배력 때문에 실효성 논란이 없지 않았지만, 그 실효성 여부와 상관없이 법정에서 한 약속은 그는 지키지 않았다.

허재호 회장의 벌금 미납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은 조만간 사그라질 것이다. 지역의 한 경제사범에 대한 이슈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김우중, 정태수 등 더 많은 추징금을 내야할 경제사범들도 여론의 관심에서 잊혀지고 있지 않은가. 허 회장에 관한 뉴스는 전국적인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있다. 앞으로 그가 약속을 이행할 것인지에 대한 감시는 지역사회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지역 권력자들의 유착 행태로 볼 때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허회장의 비호자들이 어디 장병우 전 판사뿐이겠는가. 특히나 지역사회 광주전남지역의 언론사들을 보면 다소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허재호 회장은 여전히 지역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다. 검찰 앞에서 ‘힘’ 빠져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이제 “그는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광주전남지역 최대 신문사인 광주일보의 실질적 사주다. 광주일보에선 그를 ‘회장님’이라 부른다. 광주일보는 심지어 지난 4일자 신문에 ‘황제노역’ 판결로 불명예퇴진한 ‘장병우’ 판사와 허 회장을 옹호하는 ‘장병우 판사를 위한 변명’이란 제목의 칼럼까지 실었다. 광주일보와 마찬가지로 건설사들이 대주주로 있는 대부분의 지역 언론사들도 동업자의식으로 허 회장의 사건에 대해서 언론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올 3월 초까지 허재호 회장의 인사말이 광주일보 홈페이지에 걸려있었다.  
 

이번 사건들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광주지역의 언론사와 기자들이 아닌 ‘연합뉴스’와 ‘한겨레신문’의 지역 주재 기자들의 역할이었다. 이 보도로 연합뉴스의'수백억 벌금 미납 대주그룹 회장 해외 호화생활' 보도는 한국기자협회가 수여하는 ‘이달의 기자상’을 타기도 했다. 정말 잘했다. 그러나 이들 언론사들의 지역주재 기자들이 지속적으로 지역 최대 신문사 사주의 문제를 보도하는 데는 현실적인 부담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연합뉴스의 경우 광주일보가 지역의 최대 고객 가운데 하나다. 회원사인 광주일보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을 터다. 한겨레신문 광주 주재 기자인 정대하 기자는 이 사건의 보도 과정에서 광주일보 간부의 항의성 전화를 받았다고 본지에 밝히기도 했다. 지역사회에서 주재기자로서 지역지의 다른 동료 기자들이 불편하는 기색을 보며, 지나가는 말투로라도 한마디씩 툭 ‘딴죽’ 거는 말을 던지면, 아무리 강단있는 기자라도 인간인 이상 ‘위축감’을 느끼게 된다.

   
 지난 4월 4일자 광주일보에 게재된 컬럼 '장병우 판사를 위한 변명' 
 

허재호 회장 기사에 ‘자기검열’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지역 언론계에 팽배해 있다. 심지어 허 회장이 과하게 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진 일부 지역 언론인들의 정서도 있다고 한다. 23조원에 달하는 추징금이 있는 김우중 회장 등 전 대우그룹 임원들, 1280억원의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는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등 더 큰 도둑들에 비해 ‘새발의 피’에 불과한 호남지역 기업인만 과하게 비판당하고 있다는 생각들이라고 한다.

물론 ‘평소 경제인의 범죄에 좀 관대한 보수언론들도 이 전 회장에 대해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는 걸 보면, ‘표’도둑질한 중앙의 ‘정권’도둑엔 무심하면서 ‘돈’도둑질한 호남지역의 경제사범에 대해 더 강렬하게 작동하는 언론의 ‘분노센서’가 좀 유별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보수와 진보, 중앙과 지역의 차이를 떠난 문제다. 다른 경제사범들의 문제와 비교해서 허 회장을 옹호할 게재도 아니다. 별개의 사건일 뿐이다. 허 회장 사건은 한국사회의 ‘불공정’에 대한 염증과 ‘정의’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80년 ‘정의’를 위해 군부에 저항했던 광주시민을 대변하는 지역의 언론사들은 허 회장과 허 회장을 비호한 지역 특권층의 커넥션에 대해 먼저 칼을 뽑았어야 했다.

이번 사건은 지역 특권층의 부조리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광주전남지역 언론계의 쇄신과 성찰의 계기가 돼야 한다. 그 과제 중 하나로 먼저 허 회장이 2008년 약속했던 광주일보 주식의 사회환원 약속을 이행토록 요구해야 한다. 현재 허 회장이 실질적인 사주라는 것 이외에 광주일보의 지분을 누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사회의 공기인 언론사의 주식소유 관계가 분명치 않은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광주일보의 주식소유관계를 투명하게 하고 그 관계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광주일보를 지역특권층이 아니라 시민 일반의 여론을 반영하는 언론이 될 수 있도록 허 회장과 그의 커넥션으로부터 광주일보를 독립시켜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 허 회장 사건과 같은 지역 특권층의 부조리는 지역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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