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조선일보만 본다’는 말이 나올 만큼, 박근혜 정부 들어 조선일보의 영향력이 크게 높아졌다. ‘조선일보가 의제를 설정 하면 청와대가 따라온다’는 말이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일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제5회 아시아콘퍼런스에 참석해 “존경하는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회자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표적인 것은 박근혜 정부가 2년차에 접어들면서 꺼내든 ‘통일은 대박’이다. 박근혜 정부는 집권 1년차였던 지난해,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를 취해오다가 돌연 ‘통일은 대박’을 꺼내든 것이다. 물론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로 대북정책이 변한 것은 아니나, 박 대통령은 이를 활용해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런데 사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에 앞서 조선일보는 올해 1월 1일부터 신년기획으로 ‘통일은 미래다’를 선보였다. 조선일보는 1일부터 수차례 관련 기획을 보도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방 사장을 향해 ‘존경하는’이란 표현을 썼던 아시아콘퍼런스의 주제도 통일이었다. 조선일보와 박근혜 정권이 통일 이슈에서는 발을 맞추는 모양새가 됐다.

   
▲ 박근혜 대통령이 26일 오후(현지시간)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을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의과 둘러보고 있다. 사진=청와대
 
조선일보의 ‘통일은 미래다’와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이라는 의제에도 공통점이 있다. 모두 ‘어떻게 통일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닌 단순히 통일이 되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통일의 당위성을 환기시킬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KBS가 따라붙고 있다. KBS는 지난 3월, 통일 관련 기획을 여러 차례 방송했다. KBS 뉴스9는 지난 10일부터 닷새 동안 통일 문제를 조명한 ‘분단 넘어 미래로’를 연속기획으로 보도했다. 15일 밤에는 KBS ‘통일 대기획’이란 이름의 토론회가 열렸다.

   
▲ 조선일보 1월 1일자. 1면.
 
조선일보가 설정한 의제를 박근혜 대통령이 받아 안은 셈이 되고, 이후 박 대통령이 이를 국정 2년차 추진동력으로 삼자 KBS가 적극 뒷받침하는 모양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조선일보의 힘이 국정운영에 영향을 미칠 만큼 강력해졌다는 점, 두 번째는 지상파 방송의 의제설정 능력이 현격하게 떨어졌다는 점이다.

KBS는 지난 20일 발간한 사보에서 통일 기획의도를 밝히며 “국민의 방송 KBS가 통일 한국의 과제와 미래에 대한 국민적 어젠다를 제기했다”고 강조했지만 통일 관련 담론은 이미 조선일보와 박근혜 대통령이 선점했다. KBS는 담론을 제기한 것이 아닌 청와대의 의제를 확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더 가까워보인다.

   
▲ KBS '뉴스9' 3월 10일 방송화면 갈무리.
 
또 하나의 사례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경질이다. 채 전 총장 경질 당시는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이 검찰 수사를 통해 실체를 드러내면서 청와대가 궁지에 몰렸을 때다. 그때(지난해 9월 6일) 조선일보는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의혹을 보도했다.

이후 9월 13일 법무부 감찰조사가 시작됐고 채 전 총장은 14일 전격 사퇴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사표 수리를 “진실규명 후 수리하겠다”고 거부했고 공방이 오가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은 28일 채 전 총장의 사표를 수리했다.

방송사들은 조선일보를 적극 인용 보도했다. 특히 9월15일 박근혜 대통령의 사표수리 거부 시점부터 잇달아 채 총장과 관련된 소식을 보도했다. 물론 채 전 총장의 혼외자 문제에 집중했을 뿐,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과는 연결하지 않았다. 야당의 주장을 간간히, 짧게 전달했을 뿐이다.

   
▲ 조선일보 2013년 9월 6일자. 1면.
 
때문에 지난해 10월 국회 미래창조과학부 KBS 국정감사에서 노웅래 민주당 의원은 “지난 한 달간 채동욱 혼외자식 보도에 대해 사실 확인을 했나. 조선일보를 인용해 보도한 것 아닌가”라며 “KBS가 공영방송이라면서 조선일보 2중대인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 KBS는 TV조선의 채 전 총장 가정부 관련 보도를 9월 30일 머리기사로 인용·보도하기도 했다.

문제는 최근 청와대가 조선일보 보도에 앞서 채 전 총장 관련 개인정보를 불법·무단 수집했다는데 있다. 청와대와 조선일보가 채 전 총장 개인정보를 두고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고, 당시에도 곽상도 전 민정수석과 강효상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채 전 총장 보도 전 만났다는 주장이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는 조선일보와 밀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KBS는 단순히 청와대의 홍보처 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최근 KBS가 봄 개편에서 ‘친박 평론가’로 평가받고 있는 고성국씨를 1TV의 신설 프로그램 MC로 낙점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청와대 회의와 대통령 연설을 생중계 하는 모습은 그런 의혹을 더욱 가중시킨다.

   
▲ 2013년 9월 30일 KBS '뉴스9' 보도 화면 갈무리, KBS는 이 보도를 TV조선을 인용해 보도했다. 왼쪽은 당시 KBS 앵커였던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채동욱 전 총장에 대한 프로세스는 조선일보가 문제를 제기하면 청와대와 검찰이 비판하고 공영방송이 부풀려 키워, 결국 낙인을 찍고 쫒아내는 형식이고 ‘통일은 대박’도 그런 프로세스를 거쳤다”며 “보수화된 언론과 정치권력의 결탁이 결국 여론을 호도하는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공영방송은 대놓고 조선일보처럼 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며 “정치권력이 원하는 것에 보수화된 공영방송이 동원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선일보가 먼저 특정 이슈를 ‘세팅’하는 것에 대해 “아니면 말고 식의 주장을 정부가 할 수 없으니 보수 언론을 동원하는 것”이라며 “나름 적당한 상생의 효과”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문제는 공영방송이 하향평준화·보수화 되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라며 “언론이 제대로 문제를 검증하지 않고 여론을 만들고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공영방송이 죽으니, 언론이 사회적 공기로서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안되고 있는 것”이라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처럼 공영방송이 문제를 밝히고, 의제화 하고, 사회가 변하는 과정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그런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가 직접 거론하기 어려운 의제, 혹은 여론의 뒷받침이 필요한 정책에 조선일보를 활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청와대가 직접 나서고, 그러면 지상파 방송이 이를 뒷받침 하는 이른바 “세트 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 최 교수의 지적이다.

문제는 KBS 내부에서도 스스로 의제를 설정할 기능을 포기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를 보고 하루 보도의 방향이 정해진다는 증언도 나온다. KBS의 한 내부 구성원은 “보도국 간부들이 조선일보를 펴 놓고 그날 기사의 ‘야마’(기사 방향)를 정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또 다른 구성원은 “그 정도까지 하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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