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 전 3월 17일 새벽 3시 15분,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에 200여명의 괴한이 난입했다.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며 박정희 유신독재에 저항하던 동아일보 기자와 동아방송 PD·아나운서 160여명이 이곳에서 5일 째 밤샘농성 중이었다. 1973년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동아방송 신입 공채아나운서로 입사한 맹경순(사진)씨도 농성에 참여했다.

당시 만 24세로 농성자 가운데 막내였던 맹씨는 몸이 안 좋아 3월 16일 집에 다녀왔다. 다음날, 다시 찾은 농성장은 괴한의 발길질에 파괴됐고, 초봄의 한기만 남아있었다. 단식 중이었던 정연주 동아일보 기자(전 KBS사장)를 비롯해 많은 선배들이 폭력에 당했다. 운 좋게 참사를 피해 다행스런 마음과 동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교차했다.

동아방송은 1970년대 아나운서 지망생에게 ‘꿈의 직장’이었다. 꿈의 직장에 합격한 신입사원은 행복했다. 맹경순씨는 “동아방송 선배들은 문화예술에 대한 탐구심이 많았고 아나운서실은 자유롭고 개성을 존중해주는 문화였다”고 회상했다. 맹씨는 입사이후 1시간 30분짜리 교통정보 프로그램 <나는 모범운전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재밌는 광화문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맹씨는 “그 때(1970년대) 사건기자들은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창경원 사자가 새끼를 낳았다는 기사로 대체해야 하는 걸 제일 싫어했다”고 회상했다. 기자들의 야성은 독재 권력의 치부를 건드렸다. 결과는 대량해고였다. 맹씨는 “회사의 회유로 들어가는 건 언론운동 이전에, 함께 일했던 선배들에게 도리가 아니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예의였다”고 말했다. 맹씨도 사표를 냈다.

   
▲ 1974년 7월 10일자 동아일보 6면(좌)와 현재 맹경순 씨(우)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는 그렇게 시작됐다. 벌써 39년이 흘렀다. 맹씨는 “지금 다시 하겠느냐고 하면 자신은 없다”고 말했다. 동아투위 언론인들은 병을 얻었고, 구직에 어려움을 겪었다. 맹씨는 프리랜서로 MBC와 KBS에서 다행이 일은 할 수 있었다. “소속감이 없다는 게 외롭고 쓸쓸했다. 그 당시 정신적 외상일 수 있는데, 사람과 밝게 인사하고 일하기가 어려웠다” 이 와중에도 소속을 알 수 없는 정보기관 사람이 이사하는 집마다 맹 씨를 찾아왔다.

동아투위 선배들은 민주화의 열망을 담아 1980년대 <말>지를 창간했다. 맹경순 아나운서는 1989년 평화방송 개국 멤버로 참여했다. 아나운서실장을 거쳐 2007년 아나운서 대상을 수상한 뒤 정년퇴임했다. 올해 1월부터는 미디어협동조합 국민TV라디오 <맹경순의 아름다운 세상>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국민TV라디오 ‘동아투위’ 특집방송에서 10분 간 12시뉴스를 진행한 것이 계기였다.

맹경순씨는 “국민TV는 지금까지와는 너무 자유로운 문화여서 당황했다. 하지만 (적응 이후) 오히려 나를 표현하고 사람들과 교감하는 게 자유로워졌다”며 “다시 방송을 하게 된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어 “동아방송 선배들을 생각하면 미안하다. 그 분들은 동아방송 사태가 없었으면 하고 싶은 만큼 일했을 텐데, 타의에 의해 그만 두었다”며 “(대량 해직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아직도 분하다”고 말했다.

동아투위 사건은 비판언론인을 언론계에서 추방·격리시키는 유신독재의 언론통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2010년 서울중앙지법은 동아투위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동아투위 위원들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강제 해직됐다는 사실은 인정되지만 소멸 시효가 지나 국가가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는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맹경순씨는 동아투위 사건 해결을 위해 동아일보가 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때 그 시절 신문사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을 질타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역사를 왜곡했다. 잘못을 왜 인정하지 못하나. 전범국가 독일처럼 참담하고 비루했던 역사에 대해 사과하고 안아야 치유할 수 있다” 1975년 꿈 많았던 막내 아나운서는 이제 귀여운 손녀를 둔 할머니가 되었지만, 여전히 39년 전의 그 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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