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논란의 실체가 하나씩 드러나는 가운데, 일부 언론이 이미 법원에서 다뤄졌거나 수사기관에 해명한 내용을 ‘새로운 팩트’라고 보도해 논란이 일고 있다.

세계일보는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3일 동안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의심할 만하다는 기사를 계속 내보냈다. 세계일보는 3일 9면 기사 <‘공무원 간첩 의혹’ 유우성 미스터리>에서 “사건의 핵심인물인 유우성씨의 실체를 둘러싼 미스터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며 공안당국에서 유씨가 북한 보위부의 사주를 받은 시점으로 지목한 2006년 이후 유씨의 대외활동이 증가한 점, 유씨가 가려씨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전 노트북을 포맷하고 휴대전화를 쓴 점 등이 의심의 근거라고 밝혔다.

세계일보는 4일 5면 기사 <4개국서 이중삼중 신분세탁…상황 따라 이름·생일·국적 바꿔>에서 “유우성씨의 실체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정황이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며 유씨가 유광일, 유가강, 조광일, 유우성 등 4개의 이름을 섞어 쓰며 신분세탁을 했고, 공문서 위조를 했다고 밝혔다. “간첩 의심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것이다. 세계일보는 “북한에서는 존재하지도 않은 가공의 인물 유광일을 만들어 김일성 사회주의 청년동맹원인 척 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 측 인사가 개입했을 것이라는 게 공안당국 판단”이라고 밝혔다. 세계일보는 5일 지면 기사에서 ‘유우성 위조신분증’을 단독 입수했다며 유씨가 위조된 북한 신분증을 사용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 4일자 세계일보 5면
 
세계일보는 4일 온라인판 단독기사 <‘간첩혐의’ 공무원 유우성 아리송한 정체>에서 “유우성씨가 4일 영국 정부에 망명을 신청한 전력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통상 망명 시도는 정치적 문제와 밀접하다는 점에서 유씨의 망명 신청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전했다. 세계일보는 “유씨는 2008년 1∼7월 어학연수 명목으로 영국을 다녀왔다. 유씨의 이런 행적은 재판 과정에서 일부 드러났다”며 “하지만 유씨는 출국 후 단순히 어학연수를 했던 게 아니라 영국 정부에 망명 신청을 하는 등 한국을 벗어나려 했던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고 전했다.

TV 조선 역시 4일 ‘특보’를 통해 유씨의 영국 망명과 신분 세탁 사실을 보도했다. TV조선은 “우리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거나, 간첩 활동에 염증을 느껴 제3국으로의 도피를 생각했을 것” “이중, 삼중으로 얽힌 신분세탁 과정 때문에 유씨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등의 표현을 써가며 유씨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 같은 보도내용은 대부분 새로운 팩트라기보다 이미 1심 재판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이며, 수사기관에 증언한 내용이라는 것이 유씨측 입장이다. 김용민 공동변호인단 변호사는 5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1심 재판과 수사과정에서 다 이야기됐던 내용”이라고 밝혔다. 이름을 네 차례 바꾸며 신분세탁을 했다는 보도는 새로 밝혀진 사실이 아니라 유씨가 2009년과 2010년 국가보안법 등으로 수사를 받을 때 수사 기관에서 진술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당시 유씨는 국가보안법 위반과 관련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 4일자 TV조선 뉴스특보 갈무리
 
김용민 변호사는 영국 망명설에 대해 “영국에 영어 공부를 하러 갔다가 돈도 없는 처지에 마침 그쪽에서 난민으로 신청하면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영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난민 신청을 한 것”이라며 “유광일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한국 국적을 받았기에 조광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쓴 것”이라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아르바이트하며 6개월 영어 배우며 고생한 이야기를 국적 세탁한 것처럼 자극적으로 보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정 역시 수사기관에 이미 진술했던 내용이라는 것.

이들 언론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까. 세계일보는 4일 기사에서 “유씨의 1심 재판과정에서 신분증은 위조된 것임이 드러났다”며 “유씨는 최소 4개국 공문서를 위조 또는 도용했고, 이 과정에서 정착지원금 등 2500만원 가량도 챙겼다. 이 부분은 1심 법원에서 유죄까지 받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잘 알면서 1심 법원에서 유죄받은 내용을 재탕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보수언론이 이미 나왔던 이야기를 근거로 간첩 의혹을 재탕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문화일보는 지난 17일 유우성씨가 북한에서 목격됐다는 탈북자 증언을 토대로 “공방이 가열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탈북자 증언은 이미 1심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관련 기사 : <문화일보, ‘신빙성 없는’ 탈북자 증언이 ‘반박논리’?>)

유우성씨 변호인측은 몇몇 언론이 증거조작 사건을 ‘물타기’하려고 유씨의 간첩 의혹을 재탕하는 것이라 의심하고 있다. 김용민 변호사는 “물타기 의도로 보이며, 더 이상 (증거조작에 대해) 할 말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민 변호사는 또 “국정원이나 검찰에서 정보를 의도적으로 언론에 흘리는 것 같다. 언론에서 독자적으로 알 수 없는 이야기 아닌가”라며 정보 출처를 의심했다. 신분 세탁이나 영국 망명 등은 유씨가 수사기관에 진술한 것으로, 수사기관이 아니면 자세히 알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증거조작 사건을 조사 중인 윤갑근 대검 강력부장은 지난 3일 조선족 정보원이 국정원에 거짓 정보를 흘렸다는 언론보도가 나오자 “언론보도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 외부에서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기자들도 특정 사람이나 세력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을 감안해 달라”고 밝혔다. 몇몇 언론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흘린 정보를 가지고 증거조작 사건 물타기에 앞장서고 있는 것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한편 기사를 작성한 박현준 세계일보 기자는 “기사의 취지는 기사 안에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검찰이 법원에 증거로 제시한 문서에 실제 ‘오류’가 있었는지와는 별개로 유씨의 실체가 무엇인지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것. 박 기자는 물타기 의혹에 대해 “기사를 기사로만 봐달라. 실체를 밝히려 할 뿐”이라며 “(그런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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