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 1년, ‘안녕하지 못했던’ 1년, 정권에 반하는 이들을 싸잡아 ‘종북’으로 몰아냈던 1년이었다. 정권과 자본권력의 도구라고 비난을 받던 검찰까지도 지난 18대 대선에 전방위로 개입한 국정원을 ‘신매카시즘 행태’라고 규정했고 천주교와 개신교, 불교 등 종교계도 자유로운 종교활동과 언론자유·인권을 침해하는 ‘신공안정국’을 규탄했다. 이에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이들의 행동에 “묵과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정권의 불의에 저항하는 ‘의인(義人)’들은 진실과 정의를 갈구하며 거리에서, 법정에서, 공직과 학교에서 묵묵히 싸웠다. 이들은 지난 엄혹한 시대의 부끄러운 기록인 동시에, 맞이할 미래에 희망의 끈을 쥔 주역들이다. 미디어오늘은 신년기획으로 ‘2013 불의에 맞선 10인의 의인’을 선정했지만 지난해 이들과 뜻을 함께했던 모두가 의인이었다. 

1. 권은희 전 서울수서경찰서 수사과장

“(서울경찰청의 중간수사결과 발표가)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부정한 목적으로 하였음은 분명하다고 판단합니다.”

   
▲ 권은희 전 수서서 수사과장
 
지난해 검찰이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수사를 축소·은폐하도록 부당한 외압을 행사한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징역 4년을 구형하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바로 권은희 전 서울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다. 김 전 청장 측 변호인조차도 검찰의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언은 권 과장의 진술이 유일하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지난해 가장 용기 있게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연루된 경찰 수뇌부의 외압 사실을 폭로했다. 권 과장은 지난해 4월 언론을 통해 서울청이 국정원 여직원 댓글 수사에 부당 개입했다고 고발한 후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중간수사결과 발표는 발표 권한이 있는 수서서 수사팀이 자료를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권한을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서울청에서 범위를 정해 발표했기 때문에 은폐·축소된 수사 발표”라고 증언하는 등 ‘양심선언’으로 국민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권 과장은 김 전 청장 공판 증인으로도 출석해 “김 전 청장이 화를 내면서 영장신청을 막았다”고 진술했다. 그는 지난해 2월 국정원 사건 수사 도중 송파경찰서로 전보됐다.

2. 윤석열 전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장

“국정원 사건 수사 초기부터 외압이 있었으며, 황교안 법무부 장관도 (외압에서) 무관하지 않다”

   
▲ 윤석열 여주지청장
 

채동욱 전 검찰총장에 이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하던 윤석열 국정원 특별수사팀장마저 법무부로부터 ‘찍어내기’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윤 전 팀장은 지난해 4월 여주지청장으로 발령이 났지만 곧바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맡아 국정원을 신속하게 압수수색했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청장의 공판 신문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는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해 10월 18일 국정원 직원의 압수수색·체포영장 및 공소장변경 과정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사에서 전격 배제됐다. 윤 전 팀장은 이후 10월 21일 서울고검 국정감사 증인으로 나와 수사 과정에서 법무부로부터 외압을 받았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에 대검찰청은 윤 전 팀장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 과정에서 지휘부에 보고를 누락했다는 등의 이유로 법무부에 정직과 감봉 징계를 청구했고, 법무부는 12월 18일 그에게 정직 1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윤 전 팀장은 “(국정원 직원) 체포영장을 청구하지 말라는 지시는 위법하고 부당한 명령이기 때문에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은 징계 사유가 아니다”고 결백을 주장했지만 징계가 집행되자 “어떻게 하는 게 검찰이 똑바로 서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보고 결정할 것”이라며 상황에 따라 행정소송을 진행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3. 박창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원로신부

“민주주의가 붕괴되고 그 무서운 유신시대로 복귀하고 있는 현실, 남과 북이 갈라져 평화가 위협당하는 현실에서 하는 아주 간절한 미사 기도가 돼야 합니다.”

   
▲ 박창신 원로신부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총체적인 불법·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국선언에 종교인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 데에는 박근혜 정부 취임 이후 대통령의 사퇴 촉구를 처음으로 요구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있었다. 특히 지난해 10월 박창신 전주교구 원로신부의 발언 이후 박 대통령까지도 “묵과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등 ‘종북몰이’와 ‘종교탄압’으로까지 이어지는 큰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이에 개신교와 불교를 비롯한 종교계의 정권 퇴진·대통령 참회를 촉구하는 시국선언과 시국기도회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기독교 공동대책위원회는 박 신부에 대한 검찰 수사 등 공안탄압에 대해 “현 집권세력이 신앙과 양심에 입각해 종교계 성직자들이 강론 과정에서 한 발언조차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종북 세력으로 규정하며 탄압을 노골화하는 작태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고 밝혔고,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도 “일부 종교인과 지식인, 언론인들 역시 ‘종북’ ‘불순분자’ ‘빨갱이’ 등의 표현을 함으로써 국민의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대열에 서 있어, 뜻있고 책임 있는 지도자라면 그런 발언이 발붙이지 못하게 앞장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4. 밀양의 할배·할매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하고 처참한 상황들이 밀양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할머니들이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울부짖습니다.”

   
▲ 故 유한숙씨
 

지난해 12월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음독자살을 시도했던 주민 유한숙(74)씨가 세상을 떠났다. 유씨는 임종 전 딸과 밀양 주민들을 만난 자리에서 “철탑이 들어서면 아무것도 못 한다. 살아서 그것을 볼 바에야 죽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지난 2012년 1월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던 밀양 주민 이치우씨(당시 74세)의 분신자살 이후 두 번째 희생자다.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정부와 주민과의 갈등은 올해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전은 지난해 10월 송전탑 공사를 재개해 현재 22곳에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한전은 “송전선로 경과지 주민 10명 중 8명의 세대별 개별지원금 신청이 있었고 5곳의 철탑 조립을 완료했다”며 공사 강행의 뜻을 밝혔다. 국회는 양자 간의 중재를 위해 송전탑 건설 예정 지역의 재산보상 범위 확대 등의 내용이 담긴 ‘밀양송전탑지원법’을 통과시켰지만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는 “마을 주민들에게 개별 지급되는 보상금은 법적 근거와 객관적인 기준이 없을 뿐 아니라 마을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한편 2차 밀양 희망버스는 오는 25일~26일 1박 2일 일정으로 전국에서 출발할 예정이다.

5. 고(故) 최종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 전태일님처럼 그러진(분신하진) 못해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 故 최종범 열사
 
지난해 10월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에서 4년 차 기사로 일하던 최종범(33)씨가 짧은 유언을 남기고 자신의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최씨의 죽음에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노조탄압, 위장도급 등의 문제가 얽혀있다. 실제로 최씨가 일하던 센터 사장은 고객의 불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최씨에게 “인마 새끼야, 시너 뿌려서 같이 죽어버리면 되지”라는 등 욕설과 모욕을 주기도 했다. 앞서 9월에는 대구 칠곡센터에서 근무하던 3년 차 기사 임현우씨(36)가 장시간 노동과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 과로사로 추정되는 중증 뇌출혈로 숨졌다. 아울러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에 대한 탄압까지 행해졌다. 지회 결의대회를 가기 위해 낸 ‘주말’ 휴가에 한 협력업체 사장은 “정리하겠다”고 했고, 노조원은 사무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등의 부당노동행위가 지난해 7월부터 꾸준히 이어졌다. 최씨의 죽음 이후 12월 20일 지회는 사측과 협상 끝에 최씨의 유족에게 사과하고 노조 활동을 보장한다는 등 6개 협상안에 대해 합의했다.

6.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난 후회하지 않을 비책과 방책을 준비해왔다. 내가 살아온 역정하에서 얼마든지 정부 권력에 빌붙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어떤 박해를 받더라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 직원의 선거개입 댓글 의혹에 대해 경찰이 즉각적인 진압과 수사를 해야 했다고 주장하다 아예 교수직을 내던졌다. 표 전 교수는 경찰대 교수 시절 분석적이고 예리한 이미지로 자신의 전공인 ‘범죄심리학’, ‘과학수사’ 등 분야를 살려 각종 살인사건 때마다 언론에 단골로 등장하던 잘나가는 수사 전문가였다. 그는 지난해 대선 이후에도 줄곧 국정원 불법선거운동 사건을 ‘국정원 게이트’ ‘내란’으로 규정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면서 메이저 언론으로부터 외면은 물론 기업체의 강의 요청도 모두 끊겼다. 그러나 표 전 교수는 이에 굴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버텨나갈 수 있는 식량을 마련해놓고 권력과 싸울 것”이라고 의지를 밝혔다. 그는 지난해 다음 아고라 이슈 청원란을 통해 국정원 게이트 사건의 국정조사를 촉구하는 온라인 서명 10만 여 명을 받아 청원서와 함께 새누리당에 전달하기도 했다. 표 전 교수의 청원서 전달과 발언 장면이 담긴 소식, 동영상 등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격려와 지지의 반응이 쇄도했다.

7. 주현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대학생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요.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지, 만일 안녕하지 못하다면 소리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

   
▲ 주현우 학생
 
지난해 12월 10일 한 학생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철도노조 파업 참가자 직위해제와 국가기관 선거개입 등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올린 후 이에 ‘응답’하는 대자보가 열풍처럼 번져 나갔다. 온라인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 ‘좋아요’ 숫자는 개설 3일 만에 20만 명을 넘어섰다. 국내에서 확산된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은 프랑스와 독일 캐나다 등 국외에서도 응답이 이어졌다. 캐나다의 한 누리꾼은 “불혹을 훌쩍 넘은 지금 안녕들 하십니까의 물음에 참 부끄럽다. 각박한 이민 사회에서 훗날 우리 아이들이 ‘안녕합니다’고 답할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14일 열린 첫 오프라인 모임에 나온 ‘안녕하지 못한’ 수백 명의 참가자들은 철도민영화 반대 집회에 참석했고, 28일에는 민주노총 총파업 100만 시민행동에도 연대했다. 처음 자필 대자보를 올린 주현우씨(고려대 경영학과·28)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내가 주인이 되는 ‘자기정치’를 하자는 게 ‘안녕들 하십니까’의 문제의식”이라고 말했다.

8.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

“그동안 반대했었던 기초연금안에 대해서 장관으로서 어떻게 국민과 국회와 야당을 설득할 수 있겠나. 장관인 나 자신의 양심의 문제다”

   
▲ 진영 전 복지부 장관
 
박근혜 정부의 기초연금 등 복지공약 후퇴와 관련해 청와대와 불협화음을 내왔던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해 9월 박 대통령의 사퇴의사 반려에도 업무 복귀를 거부했다. 현 정부 들어 초유의 ‘항명’ 사태가 벌어진 것. 진 전 장관은 현 정부의 주요 정책 골자를 짠 주역으로, 그가 박 대통령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모양새가 되면서 박근혜 정부의 공약 파기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분노는 더욱 커졌다. 당초 ‘모든 노인에게 20만 원을 지급하겠다’던 기초연금 공약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대거 후퇴해 소득 하위 70% 노인만을 대상으로 국민연금 수급액에 따라 10만~20만 원 차등 지급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진 전 장관이 정부 안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사퇴했다.

9. 정지영·백승우 ‘천안함 프로젝트’ 감독

“명백히 진실이 보이는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진실을 결정하는 누군가가 따로 있는 것 같다. 만약 우리 의심이 틀렸다 하더라도 그게 합리적 의심이라고 생각한다”

   
▲ 정지영 영화감독
 
천안함 침몰 사건의 의문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정지영 제작·백승우 연출)가 지난해 4월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대중들 앞에 처음 공개된 후 국방부의 상영금지가처분 신청과 영화관 돌연 상연중단 사태 등 홍역을 겪으며 마침내 개봉했다. 천안함 프로젝트 개봉을 지원하기 위해 진행한 크라우드 펀딩은 목표금액에 192% 초과 달성하며 많은 지지를 받았고, 법원은 “영화의 제작과 상영은 원칙적으로 헌법상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장된다”며 가처분신청을 기각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6일 메가박스 상영관은 개봉 이틀 만에 보수단체로부터 협박을 받고 영화 상영을 중단해 ‘윗선’의 외압 의혹에 대한 영화인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정지영 감독은 “천안함 프로젝트는 우리 사회의 화두인 ‘소통의 부재’에 대한 영화다. 누군가 이 영화를 국민과 유리시키려고 했으나 결과는 많은 국민이 보고 싶어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10. 류승완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

“이건희 부자와 삼성은 자본주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3대 세습을 하면서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한국사회의 불합리한 금기이다”

   
▲ 류승완 박사
 
지난 2011년 8월 11일부터 '성균관대의 강사직 박탈 철회와 시간강사 처우 개선'을 외치며 1인 시위를 했던 류승완 박사(동양철학과 시간강사·45)가 힘겨운 투쟁 후 718일 만에 성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임용돼 ‘삼성을 이긴 인물’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학교 측은 지난해 9월 다시 류 박사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성균관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성대는 류 박사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삼성을 비판한 부분에 대해 “삼성은 성균관대의 법인일 뿐 대학행정에 관여하지 않으며 이번 사건 역시 삼성과 무관하다”며 정정과 삭제를 요청했다. 성대는 지난해 12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이 일어난 후에도 ‘류승완 박사에 대한 학교의 해고는 부당하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수차례나 통보 없이 철거해 학생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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