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 하십니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언론들도 그 현상과 배경을 찾느랴 분주한 모습이다. 처음 이 현상이 나타났을 때 모른척하거나 이념 대립을 덧칠하던 일부 언론들도, ‘대자보 릴레이’가 대학을 넘어 중고등학교, 일반 시민들까지 확산되자 비로소 그 현상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있다.

그동안 언론의 보도를 보면 확산이 본격화 된 16일, 조선일보·중앙일보는 아예 보도를 내지 않았고, 동아일보는 <대학가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찬반논쟁 시끌> 기사에서 “찬반논쟁이 뜨겁다”며 “(호응도 있지만) 반대하는 목소리도 나온다”고 보도했다.

그 다음은 역시 ‘공격’ 내지는 ‘물타기’가 이어졌다. 17일 조선일보는 <대학들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에 루머도 덩달아 확산> 제하 기사를 통해 “주씨(첫 대자보를 붙인 주현우씨)가 과거 진보신당에서 활동했고, 현재 노동당 당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라고 보도했다.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에 정치색을 덧씌운 것이다.

중앙일보의 경우 같은 날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한 장에…대학가 이념 논란> 기사를 통해 현상 보다는 찬반논란을 부각시켰다. 동아일보도 <둘로 갈린 ‘캠퍼스 대자보’> 기사를 통해 마찬가지의 분석을 내놨다. 전국적으로 ‘안녕들 하십니까’가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는 반면 이에 대한 반박 대자보는 소수에 불과한데도 ‘찬반논란’으로 균형을 오히려 무너뜨린 것이다.

   
▲ 동아일보 12월 18일자. 12면.
 
18일이 되어서야 동아일보가 비교적 차분하게 이 현상에 대한 원인을 짚는 기사를 내놨다. 동아일보는 이날 <“청년층 취업-미래불안 대자보 공감으로 표출”> 제하 기사를 통해 “대자보들이 좌파·진보적 성향의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도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그만큼 젊은 세대가 그동안 ‘안녕하지 못했다’는 반증으로 해석된다”고 분석했다.

결국 ‘안녕들 하십니까’의 열풍이 일부 언론들의 선입관도 바꿔놓은 셈이다. 다만 이번 현상을 다룬 언론들의 보도 태도에서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현상의 시발점인 학생들을 바라보는 언론의 권위주의, 즉 ‘꼰대스러움’이다. 위의 동아일보 분석기사도 마찬가지다.

형태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칭찬하면서 ‘대견함’을 드러내고, 동시에 팩트 부족을 지적하는 방식이다. 즉 ‘더 알고 얘기하라’는 훈계다. 이는 동아일보의 18일 사설에서 잘 드러나 있다.

   
▲ 동아일보 12월 18일자. 사설.
 
동아일보는 사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건강한 토론문화로 이어지길>에서 “대학생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다”며 “지금의 20대는 비교적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 외동아들, 외동딸로 자라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편”이라고 말했다. 이어 “젊은이들의 정치적 사회적 무관심이 문제이지,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 표시를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동아일보는 이어 “그러나 논쟁은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며 “정부 정책은 ‘철도와 의료 민영화’라고 전제하고, 민영화가 되면 요금이 10배 넘게 뛸 것이라는 ‘괴담’ 수준의 주장이 오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실은 신성하고 의견은 자유롭다는 말이 있듯이 정확한 사실 위에서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현상을 분석하는데 있어 청년층의 사회경제적 지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일견 타당성 있다. 문제는 언론이 여기에 천착한다면 한국사회 전반에 흐르는 정치·사회·경제적 문제를 제기하는 주체로서의 청년들이 대상화될 수밖에 없다.

   
▲ 조선일보 12월 18일자. 38면.
 
이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18일자 조선일보 박두식 논설위원의 칼럼이다. 박 위원은 “젊은이들이 집단적으로 ‘우리는 안녕하지 못하다’고 외치는 사회라면 그 공동체는 이미 심각한 중증의 위기를 맞았다고 봐야 한다”며 “이것은 독재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젊은 층의 불안과 좌절·낙담을 풀어줄 정권의 능력에 걸려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박 위원은 이어 “지금이라도 청년 문제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그것이 야권이 그토록 갈망하는 젊은 층의 지지를 끌어내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이번 현상의 근간에는 국가기관의 불법대선개입문제, 철도민영화, 비정규직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요소가 담겨져 있다. 이에 대해 청년층을 중심으로 정의의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데, 여기서 ‘청년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이러니, 이들을 위한 대책을 세우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예 현상에 대한 오독에 가깝다.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를 공고히 해온 것은 기성세대를 거치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서 이를 기성세대의 탓으로 돌리기도 어렵다. 체제와 제도, 그리고 현재 제기되는 사회적 문제들이 직접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또한 기성세대들의 문제다. 현재 청년들의 불안감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인사말에 울림을 주고 있다는 분석이 타당할 수 있지만, 이는 곧 기성세대에게도 마찬가지다.

   
▲ 중앙일보 12월 18일자. 34면.
 
이와 관련해 중앙일보 권석천 논설위원의 글은 주목할 만하다. 권 위원은 “지속적인 관심과 고민이 전제된다면 결론은 어느 쪽이든 좋다”며 “그것은 곧 생각하는 보수, 생각하는 진보의 출현을 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섣불리 대자보에 이념딱지를 붙이려 해서도 그 바람에 편승하려 해서도 안 된다”며 “팩트는 토론 속에 바로잡힐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권 위원은 기성세대를 향해 “이젠 젊은 그들에게 ‘뒤쳐지면 죽는다’고 독려해 온 우리 자신을 향해 안부를 물을 차례가 아닌가”라고 말했다. 본질적인 문제를 함께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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