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고려대학교 한 학생이 철도노조 파업 참가자 직위해제와 국가기관 선거개입 등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올려 관심을 모으자 이에 ‘응답’하는 대학가의 대자보가 온·오프라인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시작은 고려대 재학 중인 주현우 학생(경영학과 08학번)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자필 대자보를 정경대 후문 게시판에 붙이면서부터다. 주현우 학생은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 이유만으로 4213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며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사회적 합의 없이는 추진하지 않겠다던 그 민영화에 반대했다는 구실로 징계라니, 과거 전태일 청년이 스스로 몸에 불을 놓아 치켜들었던 ‘노동법’에도 ‘파업권’이 없어질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주씨는 국가기관 선거개입과 밀양 송전탑 건설에 대해서도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란 초유의 사태에도, 대통령의 탄핵소추권을 가진 국회의 국회의원이 ‘사퇴하라’고 말 한마디 한 죄로 제명이 운운되는 지금이 과연 21세기가 맞는지 의문”이라며 “시골 마을에는 고압 송전탑이 들어서 주민이 음독자살을 하는 하 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13일 오후 5시경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정경대 후문을 지나는 학생들 상당수는 걸음을 멈추고 대자보를 유심히 읽고 있었다.
@이치열 기자
 
   
대자보 확산의 시작이 된 고려대 주현우 학생(경영학과 08학번)이 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자필 대자보를 한 학생이 사진 찍고 있다.
@이치열 기자
 
   
대자보가 나붙은 고려대학교 정경대 후문 한켠에는 밀양송전탑 반대투쟁중 유명을 달리한 유한숙 씨를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치열 기자
 
   
철도민영화를 막기 위한 '철도노조'의 파업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하자는 대자보가 눈에 많이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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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대 정경대 후문에는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자보 행렬이 이어졌고, 성균관대와 용인대, 중앙대, 상명대, 인천대, 연세대, 광운대, 가톨릭대, 서울대, 한양대 등으로 대자보가 퍼져 나가며 대학가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13일 오후 6시를 전후로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 ‘좋아요’ 숫자는 1만3000여 명을 넘어섰다.

한양대 사회대 13학번 호준 학생은 13일 한양대에 붙인 대자보에서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세상 앞에 침묵하니 어느덧 우리가 비정규직이 돼가고 있었고, 정치를 외면하며 정치에 침묵하니 우리의 민주적 권리가 농락당하고 있었다”며 “학교본부의 독단에 침묵하니 등록금이 오르고, 언젠가는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았‘었’다고, 철도를 공공기관에서 운영했‘었’다고, 다음 세대에 전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이 글로 인해 ‘종북’ 세력이라는 낙인이 생길까 두렵기도 하고 망설여지기도 한다”면서 “하지만 저는 이 두려움이 정녕 저에게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 글을 보고 계신 여러분들에게도 존재하는지 궁금합니다”라고 덧붙엿다.

   
대자보를 바라보고 있는 학생
@이치열
 
   
고려대학교 대학원 학생회에서 붙인 대자보는 조르지오 아감벤의 글 '동시대인은 무엇인가'를 인용해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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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의 나는 안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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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후 5시경에 한 13학번 학생이 대자보를 붙이고 있다. 대자보는 계속 늘어나 옆으로 길어지고 있었다. 
@이치열 기자
 
   
손끝이 얼어붙도록 차가운 바람에 대자보는 날리고 청테이프는 잘 붙지 않았다.
@이치열 기자
 
   
기말고사로 바빠 보이는 학생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대부분 대자보의 온오프라인 확산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어떤 고학번 학생은 국정원과 군사이버사령부 등 국가기관의 불법대선개입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기도 했다.
@이치열 기자
 

본인을 ‘무지랭이양’이라고 밝힌 연세대 한 학생은 “국정원이 121만 건의 트위터 글을 쓰면서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다고 하고, 삼성에서 서비스직 노동자로 일하던 한 남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데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시험공부를 한다”며 “세상이 어수선하고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도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신호들을 무시하는 것뿐이어서 자꾸만 불편하고 불안하다”고 고백했다.

이 학생은 이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비단 남 일 같지 않고, 나는 안녕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안녕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에 휩싸여 자꾸만 불안하다”며 “내 감수성이 지나치게 예민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노동자들이, 미래가 걱정되는 것일지 모르지만 나는 올겨울 모두가 안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3일 연세대에 붙은 대자보. 사진='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
 
   
자신을 경영학과 99학번 선배라고 밝힌 한 학생은 대자보 아래 2-30개의 손난로를 몰래 갖다 놓으며, 내일 (14일) 오후 3시 대자보 앞에 모여 '철도노조파업'집회에 연대할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글을 남겼다.
@이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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