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안에 다문화가족 엄마와 딸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함께 타고 있는 승객들은 이들 모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오늘도 불편한 세상이 느껴집니다. 그저 조금 다를 뿐인데…” 필리핀 출신 엄마의 독백은 한국 생활에 익숙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이 느끼는 ‘불편한 현재’이다. 

이어 그녀의 딸 또래 한국인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이 아이는 너무도 거리낌 없이 피부색이 다른 아이에게 다가가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여기서 상황은 반전. 필리핀 모녀는 미소를 짓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냉랭하던 승객들도 갑자기 관심을 보이며 흐뭇해한다. 이때 흘러나오는 내레이션. “편견은 가장 높은 벽이기도 하지만 가장 빨리 허물 수 있는 벽이기도 합니다. 편견의 벽을 허물고 아이들처럼 어울려 보세요…같이 가요”

여성가족부의 ‘다문화 캠페인’ 일환으로 제작된 이 동영상은 현재 TV와 극장 등에서 상영되고 있다. 정부의 다문화 정책을 홍보하면서 우리 사회에 깊숙이 내재된 이주노동자·다문화가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해소하고자 만든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정말 아이처럼 ‘해맑고’ ‘순수한’ 마음만 있으면 다문화 사회의 문제가 극복될 수 있을까. 위 동영상에서처럼 차가웠던 어른들의 시선이 ‘급방긋’하며 이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성가족부의 ‘다문화 캠페인’ 동영상
 
이번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1992년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나 산업연수생 신분인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온 아인씨(21·여)는 열 살 때부터 한국에서 자라며 초·중·고등학교를 나왔지만 자퇴하고 싶을 만큼 힘겨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2~3년 엄마와 함께 한국에서 돈을 벌어 모국으로 돌아가자던 아빠가 강제출국을 당하면서 그는 엄마와 남동생과 함께 11년을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가구공단에서 살았다.

여성센터의 도움으로 초등학교에 등교하던 첫날, 한국말도 모르고 아무도 안내해 주지 않아 혼자 운동장에서 울었다. 중학교 때 베트남 봉사활동을 다녀온 한 친구에게 “너 한국에 몸 팔러 왔냐?”는 말까지 들으며 친구들로부터 멸시도 당했다. 아인씨는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성인이 됐지만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비자가 없어서 대학 진학을 할 수 없다는 시청의 통보를 받을 무렵, 혈액이 필요한 사람을 돕기 위해 헌혈을 했는데 “신분이 확인 안 되면 혈액을 쓸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눈이 붓도록 서럽게 울었다.

“제가 뭐 에이즈 걸린 것도 아니고, 건강한 피면 쓸 수 있잖아요. 피 검사 충분히 하잖아요.”

   
우린 잘 있어요, 마석 / 고영란·이영 지음 / 클 펴냄
 
아인씨 가족에게 다문화 선진국처럼 영주권까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쫓아내지 않고 한국에서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비자라도 발급해 줬다면 아인씨는 이런 편견을 감내하고라도 한국에 계속 머무르고 싶어 했을 것이다. 방글라데시로 돌아가게 되면 영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추억이 발목을 잡을까 두렵다고 한다.

마석가구공단 이주노동자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고 기록한 ‘우린 잘 있어요, 마석’(고영란·이영 지음)은 우리 곁의 보이지 않는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하루를 보내고 어떤 고민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지 그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한국 사회를 세밀하게 조명한다.

대한민국의 근로기준법에는 ‘국적·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불법’이라는 섬에 갇힌 사람들은 장마 때 도로가 패여도 보수가 되지 않는 곳에서 고립된 삶을 살고 있다. 마석은 편견을 허물자면서 편견을 재생산하는 대한민국의 불편한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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