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게 직접 보고·지시를 받은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이 ‘국정원녀 사건’이 터진 지난해 12월11일 저녁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과 회동한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이 전 차장이 김 전 청장과 12월11일과 14일, 16일 등 총 3차례 통화한 사실도 새롭게 제기했다.

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원 전 원장에 대한 3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 전 차장은 “11일 저녁 김 전 청장을 만난 자리에서 원 전 원장으로부터 국정원 직원 ‘김하영 사건’ 관련해 연락을 받았다”며 “당시 식사 자리에서 김 전 청장에게 ‘이런 사건이 있다던데 수서경찰서에서 보고가 없었느냐’고 물으니 김 전 청장이 ‘보고가 없었다’며 잠시 사실관계를 확인했다”고 진술했다.

이 전 차장은 이날 저녁 모임 후 9시59분경 다시 김 전 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국정원 직원 관련 경찰의 수사 상황을 확인하고, 내가 파악하기에는 감금 수준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면서도 “내 얘기가 김 전 청장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은 안 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날 모임은 김 전 청장과 처음 만나 서울시 통합방위대비태세를 논했던 자리로, 2~3주 전에 미리 약속이 잡혀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전 차장은 이 모임이 있고 3일 후, 14일 저녁 8시25분경에도 김 전 청장에게 전화해 “국정원 직원의 컴퓨터 임의제출과 관련한 얘기를 했지만 김 전 청장은 그때 이 사건은 국정조사와 특검까지 고려해야 해서 철저히 수사한다는 단호한 입장이었다”고 전했다.

   
▲ 원세훈(왼쪽)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연합뉴스
 
검찰에 따르면 이 전 차장은 16일 오후에도 김 전 청장에게 전화해 “우리 일 때문에 청장뿐 아니라 경찰에게 미안하다”며 “제출한 컴퓨터에서 뭐 나온 것이 없느냐”고 묻자 김 전 청장은 “나도 모른다. (증거분석팀) 직원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통화 내용을 진술했다고 추궁했다. 그러나 이 전 차장은 끝까지 “기억이 안 난다”고 답했다.

이와 함께 검찰은 박원동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이 지난해 경찰 중간수사결과 발표가 있던 16일 오후만이 아닌 15일에도 김 전 청장에게 전화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 과정에 국정원 수뇌부가 전방위로 개입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또 이날 공판에서 이 전 차장은 원 전 원장이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김씨의 업무용 노트북 등 증거물 임의제출을 내부 직원들의 반대에도 직접 지시했다고 확인했다.

그는 국정원 직원 김씨가 오피스텔에 숨어 있는 상황에서 “보안상의 문제가 있어 민병주 (당시) 심리전단장과 나는 처음엔 증거물 제출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원 전 원장이 컴퓨터 제출하라고 지시해 이에 동의했다”고 증언했다.

이 전 차장은 “직원이 나오는 과정에서 정보기관 특성상 의혹의 대상인 컴퓨터 등 흔적을 남기는 것에 대한 내부 논란이 있었다”며 “원장은 대선개입과 정치관여가 없었다는 확신이 있었고, 직원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고 임의제출 결심을 내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김씨가 증거물 임의제출 과정에서 업무용 노트북 파일 187개를 삭제한 것과 관련해선 보고받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이 전 차장은 “부하 직원이 감금돼 당연히 상황 파악이 필요했고 민 전 단장을 통해 상황을 보고받아 원 전 원장에게 두 차례 정도 보고했다”면서도 “파일 삭제 여부는 당시 상황에선 몰랐고 최근 민 전 단장을 통해 알았다”고 답했다.

앞서 지난 2일 진행된 공판 증인으로 나왔던 민 전 단장도 김씨의 업무 파일 187개 삭제에 대해 “파일을 삭제했거나 삭제 내용이 무엇인지는 보고받은 기억이 없다”고 밝혀 내부 반대를 무릅쓰고 증거제출을 지시한 원 전 원장이 증거물 제출 범위까지 직접 결정했다는 의혹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한편 이날 검찰은 원 전 원장 측 변호인이 재판에 영향을 주기 위해 ‘이석기 사태’를 물타기 하며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검찰은 9일자 국민일보 기사에 “국정원의 사이버상 활동은 이석기 같은 사람을 추적하고 수사하기 위한 것”이라는 원 전 원장 측 변호인의 주장이 실리며 지난 기일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서가 공개된 것에 대해 “법정에서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기사에 나간 것은 우리가 언론플레이를 한다며 변호인이 질책했던 것과 모순된다”고 비판했다.

이에 재판부도 “어느 한 쪽에서 의도적 흘렸다거나 재판에 영향을 주는 기사가 나간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방청석의 기자들도 추측성 보도를 자제하고 반론권 보장 등 기사의 공정성에 좀 더 신경 써 달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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