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주 전 국가정보원 심리전단장이 소속 직원 김하영씨(29)의 업무용 노트북 등 증거물 임의제출을 반대했음에도 ‘윗선’의 지시를 받아 제출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김씨의 선거개입 활동이 탄로나자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 국정원 수뇌부가 사태 조율에 깊숙이 관여한 정황이어서 국정원 사건 수사 축소·은폐 혐의 받고 있는 경찰과의 연계에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2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원 전 원장에 대한 2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민 전 단장은 김씨가 지난해 12월11일부터 13일까지 오피스텔에 숨어있는 동안 “나에게는 경찰에서 요구하는 컴퓨터 제출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당시 나는 부서장으로서 업무 보안상 제출을 반대했음에도 ‘위’의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민 전 단장은 국정원 직원은 업무 보완이 원칙임에도 증거를 임의제출한 이유에 대해 “그 당시 노트북 등 증거 제출을 안 하면 우리가 선거활동을 했던 것으로 오해가 생길 수 있어 빨리 증거를 제출해 의혹을 풀라는 의견이 있었다”며 “우리는 선거 관련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출해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 지난달 19일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 김하영(왼쪽) 국정원 여직원과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전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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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김씨가 업무용 노트북에서 파일 187개를 복구 불가능하도록 삭제한 것과 관련해선 “그때 상황이 어수선해서 파일을 삭제했거나 삭제 내용이 무엇인지는 보고받은 기억이 없고 수사결과 발표가 난 뒤에야 알았다”며 “내가 김하영이 아니어서 답변하기 어렵지만 자기 나름의 조치를 취한 것 같다”고 에둘러 말했다.

이는 앞서 “김씨가 정상적인 정보부 직원이면 당시 상황을 소속 기관에 알리고 국정원의 지침을 기다리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검찰의 질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한 민 전 단장의 말과도 모순된다.

이날 민 전 단장이 시인한 국정원 심리전단의 업무 매뉴얼과 지시·보고 체계에 따르면 국정원장의 지시사항은 3차장을 거쳐 심리전단장을 통해 각 팀 직원들에게 하달된다. 보고 체계도 이 역순으로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상부로 직접 보고되지 않는다는 게 민 전 단장의 설명이다. 상명하복에 의한 지시·보고가 생명인 정보기관에서 소속 상관인 심리전단장이 모르게 업무 파일을 임의로 삭제한 후 본부에 보고했다는 점은 향후 국정원이 반드시 해명해야 할 부분이다.

아울러 국정원 윗선이 경찰에 증거자료 임의제출 등을 직접 지시했다는 것은 ‘국정원녀’ 사건이 불거진 이후 국정원과 서울경찰청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의심을 더욱 증폭하고 있다.

지난 23일 국정원 대선개입과 경찰의 수사 축소·은폐 의혹과 관련해 직권남용과 선거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첫 공판에서 검찰은 박원동 국정원 전 국익정보국장 등이 지난해 12월16일 경찰의 중간수사 결과 발표를 앞두고 김 전 청장에게 두 차례나 전화를 걸었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민 전 단장은 지난 대선을 앞두고 심리전단 직원과 외부 조력자가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를 언급하며 문 후보의 공약을 비판하는 게시글 작성 활동이 선거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냐는 검찰의 집중 추궁에 “특정 후보를 거론했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심리전단 활동이 종북좌파와 안보사범을 색출하는 활동이므로 낚시성 글을 올리기도 하지만 직원들이 선거 개입 목적으로 했다고 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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