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들이 국정원 정치개입이란 초유의 사태에 무너진 공정보도의 회복을 다짐하며 촛불을 들었다. 현재 자사 보도에 대한 거센 비판과 함께 언론인 스스로의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언론인들과 일반 시민 150여명은 언론노조가 16일 저녁 7시 서울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개최한 ‘국정원 대선 개입 보도 통제 규탄 및 공정 보도 실천을 위한 언론인 촛불집회’에 참가해 국정원 보도에 대한 언론인의 자기검열을 비판하고, 현 시점에서 언론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날 촛불집회에 참석한 현직 언론인들은 “언론보도가 부끄럽고 자괴감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지난 7~9일 이루어진 기자협회의 설문조사에서 영향력 0.7%, 신뢰도 0.5%를 기록한 MBC를 바라보는 언론인들의 자괴감은 컸다. 당시 신뢰도 조사에서 방송기자 가운데 MBC를 가장 신뢰한다고 응답한 언론인은 한 명도 없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현재 언론사의 보도 행태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성주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노조위원장은 “내부에선 매번 보고서를 쓰며 진실이 보도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매일 매일이 전쟁”이라고 전한 뒤 “(기자들은) 사람들 앞에 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다. 회사가 (단체협약에서) 공정방송 조항을 없애려 한다는 괴소문까지 도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면 MBC의 역사는 송두리째 아무것도 아닌 현실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유경 언론노조 전자신문 지부장은 이날 “시청광장 촛불파도를 타면서 자발적인 시민들의 힘이 상당히 무섭다고 생각했다”며 “언론인들은 보도가 잘린다고 해서 내일모레 촛불을 들고 나오자고 했을 때 자발적으로 모일 수 있는 분노들이 지금 쌓여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김유경 지부장은 “(언론인들이) 무기력에 빠져있다면 한 번 더 이야기하고 한 번 더 현장에 나가자고 손을 내밀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날 집회에는 현직 언론인 외에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새언론포럼, 언론개혁시민연대, 민주언론시민연합,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를 비롯해 이명박정부에서 공정방송투쟁을 벌이다 해고 된 해직언론인 등이 참가해 발언을 이어갔다.

이날 촛불집회에서 노종면 YTN 해직기자는 “방송사들이 CCTV 뉴스를 아주 좋아하지만 서울경찰청 디지털 증거분석실에서 127시간 CCTV영상, 오디오까지 짱짱하게 들어있는, 리포트로 만들면 몇 개를 만들 수 있는 그 CCTV는 아직까지도 보도하지 않고 있다”며 국정원 정치개입 사태를 외면하는 언론을 비판했다.


노종면 해직기자는 이어 KBS 본관 건물을 가리키며 “저 건물 망치 들고 가서 두드려 부수고 싶다. YTN 보도국에 들어가 전선 다 뽑아버리고 싶다”며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공영방송에 대한 답답함을 드러냈다.

공영방송 기자들이 촛불집회 현장에서 외면당하고, 보도국 내에선 아이템이 통과되지 않는 지금의 어려운 상황일수록 언론인들이 공정보도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당부도 이어졌다. 강성남 전국언론노조위원장은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언론 정의를 실천해가자”고 말했다. 남상석 언론노조 SBS본부 위원장은 “어느 정권이 권력을 잡든 언론이 제 할 말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 날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현재 언론에 대한 염려와 격려를 동시에 보냈다. 박이진호(40)씨는 “14일 서울광장 대국민 촛불문화제에서 오늘 KBS 앞에서 공정보도를 위한 집회가 열린다고 말한 것을 듣고 찾아왔다”며 “언론이 바로 서야 국민의 알권리가 제대로 보장된다. 언론이 침묵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서정(50)씨는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본분을 망각했다”고 비판하며 “오늘 오전 10시부터 국정원 국정조사가 실시됐는데도 KBS는 오후 2시부터 이를 방송했다. 오후에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선서를 거부했을 무렵에 KBS는 그 장면을 안 보여주고 싶었는지 엉뚱한 광고를 틀어 화가 났다”고도 말했다.

한 씨는 최근 서울광장 촛불집회에서 KBS 기자가 국민들에게 야유를 받고 쫓겨난 것을 두고 “밑에 있는 기자들은 실컷 취재해도 언론사 데스크가 보도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집회에서 쫓겨난 기자는 안에서도 싸우느라 힘들 텐데 언론사 간부들 때문에 밖에서도 욕을 듣는 게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자신을 좋은어버이연합 회원이라고 밝힌 한용헌(68)씨는 “인터넷과 SNS로만 뉴스를 접하고 있다”며 “언론은 국민의 눈과 귀, 입을 지켜주는 중요한 수단으로 국민 공동의 관심사와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지금 언론에 자유가 없다는 것쯤은 안다”고 말했다.

언론인 촛불문화제 참석자들은 이날 <우리는 민주주의 파괴의 공범이기를 단호히 거부한다>는 제목의 공정보도 실천 결의문을 내고 “어렵게 쌓아올린 공영방송의 신뢰도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상황을, 촛불집회 취재 현장에서 동료 기자들이 시민들에게 외면당하는 상황을, 민주주의의 보루가 돼야 할 언론이 민주주의 파괴의 공범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며 공정보도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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