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가 12일자로 정상 발행됐다. 한국일보는 1면에 사고(社告)를 싣고 ‘춘추필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불편부당의 자세’를 되새겼다. 지난 6월15일 장재구 회장의 편집국 폐쇄 조치 이후 줄곧 업무에서 배제돼왔던 기자들은 ‘새 출발’의 각오를 다졌다. 
 
한국일보는 1면 사고에서 “한국일보가 마침내 오늘자부터 정상 발행됐습니다”라고 알렸다. “말할 것도 없이 국민과 독자들이 한국일보를 믿고 지켜주신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일보가 정상발행된 건 무려 58일 만이다. 
 
한국일보는 “돌이켜보면 기막힌 시간이었습니다”라고 지난 58일을 술회했다. 기자들이 장재구 회장을 배임 혐의로 고발하자 이어진 ‘부당인사’와 ‘편집국 폐쇄’ 조치, 뒤를 이어 시작된 ‘짝퉁신문’이 발행 사태 등을 언급한 대목이다. 

   
▲ 2013년 8월12일자 한국일보 1면
 
 
한국일보는 “이제 한국일보 기자, 구성원들은 신문을 정상화 하면서 국민이 기대하는 언론의 바른 가치를 구현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고자 합니다”라고 밝혔다. 59년 창간 당시 내걸었던 사시 ‘춘추필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불편부당의 자세’를 강조한 대목이다.
 
독자들에 대한 ‘사죄’도 잊지 않았다. 한국일보는 “이유와 책임이 어디에 있든 이번 일로 크게 심려를 끼치고 한동안 제대로 된 신문을 전해 드리지 못한 데 대해 국민과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송구한 마음을 전합니다”라며 “변함없는 격려와 성원”을 당부했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2면 상단에서 한국일보는 “여기 여러분이 지켜주신 기자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이 있습니다”라며 “여러분, 한국일보와 기자들을 계속 지켜봐 주십시오”라고 밝혔다. 

   
 
 

   
 
 
 
   
▲ 한국일보 8월12일자 지면 상단에 게재된 기자들의 다짐.
 

3면부터 14면(7면 제외)까지 모두 11개면 상단에는 176명 기자들의 ‘바이라인’과 이들의 각오한 마디가 실렸다. “그동안 ‘짝퉁 한국일보’ 보기 힘드셨죠? 이젠 ‘진짜 한국일보’를 보내드리겠습니다”(김기중 기자)를 비롯해 기자들은 ‘새 출발’의 각오를 다졌다.
 
 
“한국일보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깊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왕태석 기자)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이 시작됐습니다. 한국일보와 함께 해주십시오.” (정상원 기자)
“한국일보 59년 유산과 독자의 정론지 염원을 밑천으로 뜨겁게 취재하고 차갑게 쓰겠습니다.” (조원일 기자)
“싸울 줄 아는 기자들이 만듭니다. 한국일보입니다.” (정지용 기자)
“한국일보 기자인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다시, 첫발을 뗍니다.” (이희정 기자)
“오랜 시간 펜을 갈았습니다. 뾰족하게 쓰겠습니다.” (라제기 기자)
“다시 수첩을 삽니다. 눈이 부셔요. 빽빽하게 채워 있는 그대로 쓰겠습니다.” (김민호 기자)
“힘있는 자들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신문을 만들겠습니다!” (이왕구 기자)
“어떤 세력도 지배하고 이용할 수 없는 ‘까칠한 입’이 되겠습니다.” (한준규 기자)

“타성에 젖을 때마다 2013년 6월17일자 한국일보를 펼쳐, 그날을 떠올리겠습니다.” (박관규 기자)
“편집국 밖에서의 다짐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김주영 기자)
“나태해질 때마다 23일간 앉아 있었던 한진빌딩 1층 로비 맨 바닥의 딱딱함을 떠올리겠습니다.” (김소연 기자)
“입사 20년간 한국일보 제호가 이렇게 무거운지 몰랐습니다. 기사 한 글자마다 그 무게를 싣겠습니다.” (정영오 기자)
“매일, 어제보다 좋아진 신문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조철환 기자)
“독자분들의 지지와 응원, 바른 언론 정정당당한 지면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김주성 기자)

“새로운 한국일보로 드디어 인사드립니다. 독다 여러분들은 기대하시고 타 언론사 동료분들은 긴장하세요.” (이태무 기자)
“더 똘똘 뭉친 진짜 한국일보 기자들이 갑니다. 타사 선후배 동료 여러분 긴장하세요.” (정민승 기자)
“한국일보 부활의 날갯짓, 이제 시작입니다.” (송정근 기자)
 
 
예전처럼 32면이 발행된 이날 신문에는 ‘군대문화에 젖은 대한민국’(1·2·3면)과 ‘NLL과 대화록 논란’ 전문가 설문(2·9면), ‘금융실명제 20년, 지하경제의 역습’(4·5면) 등 굵직굵직한 기획 기사가 실렸다. 이 가운데 ‘편집권 독립’을 화두로 내세운 대목도 눈에 띄었다.
 
‘언론, 다시 길을 모색한다’(11면)는 제목의 기획에서 한국일보는 ‘언론의 자유’에 주목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는 촛불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 사안을 애써 외면하거나 야당의 정쟁으로 축소하는 언론”에 초점을 맞춘 것.

   
▲ 한국일보 8월12일자 11면
 
 
한국일보는 지난해 MBC·KBS·YTN·연합뉴스 등에서 낙하산 사장의 퇴진과 공정방송을 요구하며 이어졌던 파업 사태를 소개했다. 그러나 “불공정 보도의 원흉으로 지목된 간부들은 여전히 조직을 장악하고 있”고, 파업에 나섰던 기자들은 해직과 징계를 받았다는 것이다.
 
한국일보는 “공정보도를 지키려는 명분과 대의의 싸움에서 좌절한 언론인들이 만든 ‘뉴스타파’, ‘고발뉴스’, ‘국민TV’ 등의 대안언론 발돋움은 반길 일이지만 서글픈 한국언론 현실의 방증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한국일보는 “언론 학자들은 한국의 언론 현실뿐 아니라 법에서조차 ‘편집권 독립’이 후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고 전했다. 편집국 독립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언론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기본 취지를 법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소개했다. 
 
해외 사례들도 소개됐다. 한국일보는 편집권 독립을 놓고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호주 ‘페어팩스 미디어’의 사례와 편집권 독립을 ‘비영리재단’ 설립으로 풀어나간 영국 <가디언>, 독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등의 사례를 전했다.  
 
한편 한국일보가 ‘정상 발행’됨에 따라, 칼럼 필진들도 복귀 인사를 전했다. ‘길 위의 이야기’를 연재하던 신해욱 시인은 “한국일보가 지난했던 한 시절과 제대로 ‘안녕’하고 멋진 새 출발로 ‘안녕’ 하길 마음 깊이 기원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시로 여는 아침’을 연재했던 진은영 시인은 기고문에서 “한국일보 노조의 투쟁에는 지나친 부분이 조금도 없다”며 “적어도 36.5°C를 유지하려는 이 투쟁의 온도가 우리 사회의 상식의 체온”이라고 썼다.  
 
한국일보는 회사 측에 의해 경질됐던 정병진 주필을 10일자로 다시 복귀시켰다. 논설위원들이 사설 게재를 거부한 이후 ‘구원투수’로 임명됐던 강병태씨는 논설고문으로 발령났다. 이계성 편집국장 직대는 조만간 새로운 부장단 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