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자 중앙일보 취재일기. 지난 4일 사법연수생 95명이 채동욱 검찰총장에게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대한 엄중 수사를 촉구하는 의견서를 보낸 것이 문제란다.

제목은 <재판도 열기 전 “엄벌” 요구한 예비 법조인들>이다. 김기환 사회부기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사법연수생들이 무죄추정의 원칙을 어기고 정치적으로 사안의 시비를 가린 뒤 재판결과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 이는 공무원법 위반 소지가 있다.” (관련기사 = ‘사법연수생 95명 검찰총장에 국정원 사건 엄정처리 촉구 의견서’ 보기)

김기환 기자의 논거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 “국정원 의혹사건은 여야 간 정치적 갈등이 첨예한 사안이다. 이번 집단행동을 두고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당사자들이 재판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검찰총장을 상대로 한 집단행동은 자칫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로 비칠 수 있다. 사법연수원 교수 출신의 법관은 ‘재판도 열기 전에 엄중 처벌하라는 주장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무시한 채 유죄라고 예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우선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이 정치적 갈등이라는 김 기자의 정의부터 잘못됐다. 정치적 갈등이란 이해관계에 따라 찬반이 엇갈릴 때 쓸 수 있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검찰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을 선거법위반으로 기소한 사실이 정치적 갈등 사안인가. 국가정보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절차에 개입하는 것이 정치적 갈등 사안인가. 이 사안은 찬반이 엇갈릴 수 없는 문제다.

   
▲ 중앙일보 8일자 29면 오피니언.
 
사법연수생 95명 또한 이 점을 인지하고 검찰총장에게 보내는 의견서에서 “국가정보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절차에 개입하는 것은 헌법상 최고 통치기구인 대통령에 대한 민주적 정당성을 훼손하는 헌정 문란의 범죄라는 점을 검찰총장님께서 충분히 감안하시어 이 사건을 정당하게 처리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사법연수생들은 의견서에서 “원 전 원장과 김 전 청장을 기소하신 검사님들을 지켜보며 그 노고와 용기에 깊이 감사하고 응원하고 있다”며 “우리 사법체계가 상정하고 있는 합당한 처단을 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힘써 주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마치 검찰을 믿지 못해 적극적으로 수사 과정에 개입하려했다는 식의 취재일기 뉘앙스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시점에서 의견서를 전달했을까.

현재 한국 사회는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이란 중차대한 문제가 국정원의 갑작스런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그 중요도가 희석되었다. 여기에 새누리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발언을 두고 논란을 부채질하자 보수언론은 야당이 제기하는 국정원 선거개입 추가의혹 및 문제제기를 정쟁의 대상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 헌정질서를 지켜야 하는 법조인의 입장에선 이번 사건을 철저히 짚고 경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번 행동을 단순히 공무원법 위반과 같은 시비로 치부할 문제가 아닌 이유다.

설령 기자의 ‘의심’대로 이들이 정말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재판 결과에 영향을 끼치고자 했다고 치자. 그랬다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보도자료를 뿌리고 기자회견을 열고 사법연수생 대표가 방송인터뷰에도 출연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들의 의견서는 보도자료로 준비되지 않았고, 법률신문에 의해 최초 보도됐으며, 95명의 사법연수생 가운데 어느 누구도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무시한 채 유죄로 예단했다는 주장은 어떻게 봐야 할까. 연수생들은 의견서에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근거로 국가정보원이 자신들의 편향된 의견을 조직적으로 배포한 사실이 헌법 제7조가 상정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의 본질을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 검찰과 국가정보원.
ⓒCBS노컷뉴스
 
김용판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해서는 그의 지시로 수사기록들이 증거를 남기지 않는 수기로 이루어졌고, 김 청장이 자료를 모두 폐기하도록 지시한 것이 권한 남용에 해당하며, 범죄사실을 발견하고도 증거를 은폐하고 스스로 도출한 결론과도 다른 발표를 하는 것은 사법경찰관들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라 지적했다. 이 같은 지적은 모두 법 조항과 수사결과 및 판례에 기반한 것이다. 

때문에 사법연수생들의 의견을 두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어겼다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만약 사법연수생들의 법 해석이 틀렸다면, 원세훈 전 원장을 선거법 위반 등으로 기소한 검찰의 판단이 문제라는 논리로 이어져야 하는 게 맞다.   

김기훈 기자는 취재일기에서 “법조인은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길을 잡는 소방수다. 예비 법조인들이 민감한 검찰 수사마다 건건이 의견서를 낸다면 불길을 키우는 도화선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면 맞는 말이다. 기자 말대로 법조인은 소방수가 맞다. 소방수가 불을 끄기 위해 먼저 할 일은 발화지점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다. 그래야 불을 완벽하게 끈다. 이번 일은 예비법조인들이 공부한 것을 토대로 사건의 ‘발화지점’을 인지해 불을 끄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용기를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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