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저널리즘의 위기는 다층적이다. 출입처 중심의 취재관행과 심층 취재 부족은 뉴스의 전문성 부족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프라인에선 광고에 의존하는 수익모델에 위기가 왔다. 온라인에선 조회 수를 올려 돈을 버는 ‘클릭 저널리즘’이 야만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공영방송은 여론의 공론장 역할을 하는 대신 여론을 잠재우며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지역언론은 고사 직전이다. 서울공화국의 단면이다.
미디어오늘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대안적 모델을 찾는 연재를 기획했다. 건강한 저널리즘 없이 사회는 진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5월 23일부터 2주간 영국・프랑스・독일 등 해외 언론현장을 찾아 저널리즘이 ‘사양산업’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보여주는 움직임에 주목했다. 자본에 휘둘리지 않으며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는 공영방송, 온라인 뉴스 유료화에 성공한 탐사보도매체, 지역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며 생존한 지역 언론까지 여러 도전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저널리즘의 위기, 뉴스의 미래①] 지역신문의 살 길, 결국 지역에 있다 : 틴틀 미디어그룹 회장 레이 틴틀 경 인터뷰
[저널리즘의 위기, 뉴스의 미래②] 언론의 독립을 원한다면, 독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메디아파르’ 편집국장 에드위 플레넬 인터뷰
[저널리즘의 위기, 뉴스의 미래③] 국경 없는 공영방송이 유럽을 감싸고 있다: 프랑스·독일 협력공영방송 아르떼(ARTE)
[저널리즘의 위기, 뉴스의 미래④] 91년 역사의 세계 최대 공영방송 BBC, 연이은 인력감축 속에도 상식 통해 영광 지켜내

“정치가 방송 내용에 개입한다? 그런 문제들은 독일에서 일어나기 어렵다.”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지난달 29일, 독일 마인츠(Mainz)에 위치한 독일 제2의 공영방송 ZDF(Zweites Deutsches Fernsehen) 본사 사무실에서 만난 국제관계 담당 고문 요하네스 막스 욈(Johannes Max Oehm)은 여러 차례 힘주어 말했다. 질문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는 “독일은 정치가 방송의 내용에 개입할 수 없도록 프랑스나 영국 등 유럽의 다른 어느 나라들보다 강력한 안전장치를 도입해 두었다”고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들어봤다.

   
ZDF 국제관계 담당 요하네스 막스 윔 고문
 
나찌의 기억…“독립성이 방송의 핵심”

“독일은 나찌의 경험이 있다. 방송을 장악해 프로파간다를 일삼았던 경험에서 출발했다. 언론의 공정성과 중립성, 독립성을 강하게 보장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독일의 헌법적 전통에서 출발한다. 전후에 헌법과 법을 제정하면서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만들어 놨다. 그 이후 독일에서 언론의 자유가 큰 위협을 받은 적은 없었다.”

어느 민주국가와 마찬가지로, 독일 역시 헌법에 언론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다. “검열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 조문은 선언적 구호로만 머물지 않는다.  ZDF는 철저하게 ‘국가로부터의 자유(Staatsfreiheit)’를 인정받는다. “정부를 비롯한 어떤 외부의 압력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프로그램을 제작·방송할 수 있도록 철저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헌법적 가치를 이어 받은 관련법과 수많은 세부 규정들의 산물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매주 금요일에 방송되는 프로그램 중에 정치인들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게 있다. 연방 총리나 장관, 여야 의원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이 등장한다. 물론 (풍자의 대상이 된) 정치인들이 기분 나빠하는 경우는 있다. 가끔 ‘너무 심한 거 아니냐’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없애야 한다고 직접적인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정치인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동의가 있다.”

독일에서도 방송사에 전화를 걸어 방송 내용에 대해 언급한 정치인이 있었다. 지난해 10월, 독일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슈트렙 전화 스캔들’이었다. 독일 집권 연립정부의 소수 정당인 기독교사회당(CSU)의 한스 미하엘 슈트렙 대변인은 ZDF 보도책임자에 전화를 걸어 야당인 사회민주당(SPD)의 바이에른주 지구당 전당대회 관련 보도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후폭풍은 거셌다. 즉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비판이 쏟아졌고, 결국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2009년에는 ZDF의 행정위원회(Verwaltungsrat)가 당시 니클라우스 브렌더 보도본부장의 임기 연장을 승인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건도 발생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정치인들과의 생방송 인터뷰에서 질문을 ‘세게’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욈 고문은 “정치인들의 압력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사장은 브렌더에게 후임자를 직접 추천할 수 있도록 했다. “ZDF 안에서 다른 후보를 추천해서 선정됐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정치적 외압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게 욈 고문의 설명이다.

‘지배구조가 왜 이렇게 복잡한가요?’…견제와 균형의 원리

ZDF의 지배구조에 대해 물었다. 10분 넘게 긴 설명이 이어졌다. ZDF의 소유구조는 유별나게 복잡한 구조로 짜여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왜 이렇게 복잡한가요?’라는 질문이 홈페이지에 따로 준비되어 있을 정도다. 핵심은 견제와 균형이다. 욈 고문은 “어느 쪽도 힘의 우위를 점하지 못하도록 권력을 철저하게 쪼개놓아 힘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도적으로 너무 복잡해서 어느 한 쪽에서 통일된 방향으로 끌고 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ZDF는 크게 세 가지 기구에 의해 운영된다. ZDF를 대표하는 총관리책임자(Intendant)와 방송위원회(Fernsehrat), 행정위원회(Verwanltungsrat)가 그것이다. 먼저 행정위원회는 14명의 위원들로 구성된다. ZDF가 위치한 라인란트팔츠 주를 포함해 모두 5명의 위원이 주정부에서 참여한다. 남은 9명 중 한 명은 중앙정부에서, 나머지 8명은 방송위원회에서 선출된다. 방송 프로그램의 편성 등을 감독하는 방송위원회 위원은 77명에 달한다.

77명의 방송위원회 위원(무보수 명예직)들은 각계각층을 대표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우선 독일 16개 주정부에서 각 1명씩 임명하고, 중앙정부에서는 3명의 위원을 보낸다. 각 정당의 의석수에 따라 배분되는 12명의 위원들과, 종교계가 추천한 5명(신·구교 각 2명, 유대교1명)도 합류한다. 나머지 41명 중 16명은 각 주정부에서 추천한 교육계, 과학계, 예술계 등 각계 인사들로 채워지고, 25명은 노조나 시민사회단체 등이 3배수로 추천한 후보들 중에서 선출된다.

‘너무 많지 않냐’고 물었다. 욈 고문은 “사회의 각 분야별로 폭넓게 대표성을 갖는다는 면은 큰 장점”이라고 답했다. 다만 그는 “최소 1년에 네 번은 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회의를 조직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정치권 등 외부의 압력이 작용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 만큼 충분히 지배구조가 복잡하지만, 독일에서는 논란이 한창이다. 욈 고문은 “정치인 비율이 너무 높은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어서 현재 헌법소원이 제기되어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욈 고문은 “물론 여기에도 ‘누구는 여당 쪽, 누구는 야당 쪽’ 이런 말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리는 방향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지방분권이 잘 되어 있는 독일의 특성 상, 같은 당이라고 하더라도 중앙정부의 입장과 주정부의 입장이 상반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이를 감안하면 ZDF 내에서도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수십, 수백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독일 마인츠(Mainz)에 위치한 독일 제2의 공영방송 ZDF 본사 사옥
 
“수신료 마음대로 못 올려”…재정 독립의 ‘비밀’

지난해 ZDF의 수입은 20억2800만유로(약 3조918억원)에 달한다. 이 중 수신료 수입이 17억1900만유로(약 2조6200억원)로 전체 수입의 85% 가량을 차지한다. 광고 및 후원 매출은 1억4800만유로로 전체 수입의 약 7.3%에 그쳤다. 욈 고문은 “광고를 받을 경우에도 매우 엄격한 규제를 받게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수신료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다. 수신료는 누가 결정할까. 욈 고문은 “재정적 독립도 헌법적 가치에 따라 보장되고 있다”고 말했다.

ZDF를 비롯한 독일의 공영방송사에는 재정수요조사위원회(KEF)라는 독립된 기구가 있다. 말 그대로 재정을 전담하는 기구다. 금융·재정 전문가들로 구성된 KEF는 “철저하게 정치적 입김에서 자유로운” 영역을 보장 받는다. “정치인들이 재정을 규정하게 되면 방송의 중립성과 독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16명의 독립적 위원들은 예산안을 심의하고, 이를 검토해 16개 주정부와 주의회에 넘긴다.

흥미로운 건 이렇게 마련된 예산안에 따라 ZDF에 투입되는 돈 중 중앙정부가 기여하는 부분은 없다는 사실이다. 욈 고문은 “각 지방 의회에서 의결이 되면, 각 주정부에서 온 돈을 운영자금으로 쓴다”고 말했다. “중앙정부에서 돈을 주게 되면, 예산안을 가지고 방송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KEF 위원들은 각 주정부에서 추천되지만, 순수하게 재정 부분만 담당한다. 누가 무슨 역할을 맡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규정이 있다”고 덧붙였다.

2007년, KEF가 보낸 4년치 예산안을 16개 주정부가 연합해 거부한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경제위기가 겹치면서 공공부문 예산을 감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포괄적인 이유로 예산안 승인을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결을 내렸다. 욈 고문은 “물론 정치권이나 KEF에서도 예산을 감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 얼마나 줄일지는 ZDF가 내부적으로 결정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개정된 수신료 징수법에 따라 독일은 지난 1월1일부터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가구당 일정 금액을 수신료로 징수하고 있다. 매월 17.98유로(약 2만7400원) 수준의 수신료는 ZDF를 비롯한 각 공영방송사에 배분된다. ZDF는 지난해 전체 수신료 중 12.6%에 해당하는 금액을 배분 받았다. ZDF는 이 돈을 “공정한 여론형성 과정을 보장하기 위해 각계 각층의 다양한 목소리를 폭넓게 듣고 반영하는” 공영방송의 핵심 재원으로 활용한다.

욈 고문은 “시청자들이 지불한 수신료를 핵심적인 재원으로 쓴다는 건 당연히 공영방송이 공적인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무와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공영방송’과 우리가 이해하는 ‘공영방송’이 같은 개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는 인터뷰에 앞서 “그동안 KBS 사장이 바뀌는 과정에서 여러 논란들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과 한국의 공영방송은 얼마나 닮아있을까.

위 특별기획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됐습니다.

지루한 공영방송?…“천만에!”

ZDF는 독일에서 가장 일찍부터 인터넷 서비스 등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욈 고문은 “1990년대 말부터 적극적으로 홈페이지를 만들어 서비스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ZDF는 지난 2월부터 인터넷에서 네 개의 TV채널을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별도의 사이트인 ‘ZDFmediathek’을 통해 우리나라의 ‘다시보기’ 개념의 서비스도 제공한다.

욈 고문은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을 많이 방송하기 때문에 ‘지루하다’는 편견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젊은 시청자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메인 채널과 별도로 운영되는 세 개의 특화채널 중 하나인 ‘ZDFneo’는 유명한 TV시리즈나 드라마는 물론, 실험적 다큐멘터리와 영화 들을 중점적으로 편성해 젊은 층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ZDFinfo’는 뉴스와 토론을 중점적으로 편성하고 있다. 시청자가 실시간으로 방송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인터랙티브’ 형식을 대거 차용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ZDFkultur’는 기존 방송에 비해 자유로운 형식으로 제작된 문화·예술 관련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이들 세 개 채널은 케이블과 IPTV를 통해 방송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들로부터 적지 않은 호응을 얻고 있다.

범죄 추리극의 스토리 전개 과정에 시청자들이 참여해 극을 완성해나가는 형식의 프로그램도 최근 새로 시작됐다. 욈 고문은 “제작자와 시청자들이 어디까지 상호 대화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자는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그럼에도 ‘원칙’은 분명하다. 웜 고문은 “독일의 경우 이미 노령화사회에 접어들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젊은 사람들 위주의 프로그램을 많이 편성하는 게 오히려 공공성을 저해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인구구조에 맞게 노년층의 시청자들을 배려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임무에 잘 맞는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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