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7일 삼성그룹 전 직원에게 보낸 e메일 하나로 중앙일보가 8일자 지면 한 면을 가득 채웠다.

대다수 언론사가 이건희 회장의 e메일 내용을 간추려 5~6매 내외로 무미건조하게 전한 반면, 중앙일보는 ‘삼성 신 경영 20년’의 갖는 의미와 이건희 회장의 지난 업적 등 주석을 꼼꼼히 달고 이 회장의 e메일 전문을 싣는 등 차별화된 보도를 선보였다. 이건희 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처남 매부 지간인 사실을 떠올리면 차별화된 기사의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앙일보는 8일자 16면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했던 이건희 회장의 1993년 선언과 “우리는 1등의 위기, 자만의 위기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는 지난 7일의 e메일 내용을 소개하며 “수신인은 삼성그룹 국내외 임직원 35만 7000여명. 이 회장이 임직원에게 직접 메일을 보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신문은 이 회장의 e메일 내용을 두고 “100년 기업을 향한 미래 과제 역시 메일에 담겼다”며 “과거의 영화를 경계라도 하듯 그의 시선은 다시 미래로 향했다. 그러면서 창조경영이라는 키워드를 꺼내들었다”고 소개했다.

   
▲ 중앙일보 8일자 16면 기사.
 
중앙일보는 이어 1987년 이병철 회장의 사망 이후 경영권을 갖게 된 이건희 회장이 삼성의 성장을 ‘선도’한 과정을 차분히 소개하며 “세계는 급속도로 변하고 있는데 삼성은 예전에 해왔던 상명하달식의 구태의연한 조직 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회장은 답답해했으나 개혁은 쉽지 않았다”고 적었다.

이 신문은 “(이 회장은) 묵묵히 내부에서 조직의 변화를 유도했다. 하지만 화석처럼 굳어버린 조직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질’ 경영은 좀처럼 정착되지 않았다. 파격이 필요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은 그렇게 나왔다”고 적었다. 이쯤 되면 이건희 회장의 자서전 수준이다.

중앙은 “이 회장이 (현재) ‘1등의 위기’를 언급할 수 있게 된 건 그 자체로 삼성의 성장을 의미한다”며 이 회장의 ‘업적’을 강조한 뒤 1993년 ‘신경영’ 선언이후 삼성전자의 성장과정을 수치와 함께 상세히 서술했다. 이어 “비자금 사건으로 잠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2010년 복귀한 이 회장은 곧바로 신경영 바로 세우기에 나섰다. … 이후 삼성 전자는 소프트 파워로 무장한 갤럭시 S3와 노트를 앞세워 스마트폰 시장을 평정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신문은 기업 경영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공정성을 기하려면 명암을 함께 지적해주는 게 기사의 ABC다. 더욱이 이건희 회장의 경우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에 의한 불법 경영권 승계로 국내외 비판을 받았던 인물이다. 삼성전자의 불산 누출 사고와 이후 대처는 국민들의 건강권을 위협하는 지경이고,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희귀암에 걸려 사망한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 또한 부족한 실정이다. 이건희 회장은 기업의 최고책임자 위치에 있는 만큼 이 같은 문제에 책임이 있다. 이밖에도 무노조경영, 해외공장의 노동자 착취 등은 삼성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나오던 비판이었다.

때문에 삼성이 ‘신 경영’을 외친다면 언론은 이 같은 문제에 대한 언급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중앙일보를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은 이 회장의 e메일 내용만을 전할 뿐이었다. 또한 이건희 회장은 전 직원에게 보낸 e메일에서 자신이 말한 창조경영에 대해 “실패가 두렵지 않은 도전과 혁신, 자율과 창의가 살아 숨쉬는”이라고만 표현했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처럼 추상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지적도 없었다. 언론은 ‘신 경영’ 20년을 맞아 삼성이 내놓은 일종의 ‘보도자료’에 종속돼 이건희 회장의 기만 살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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