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5·18 정신을 훼손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최근엔 5·18 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목소리가 종합편성채널(종편)과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등 극우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전방위로 확산됐다.

지난 5·18 기념식을 앞두고 TV조선과 채널A 등 일부 종편은 잇따라 극우 논객들과 탈북 인사들을 패널로 초청해 5·18 관련 ‘북한군 개입설’을 일방적으로 퍼뜨려 큰 반발을 샀다.

채널A는 지난 15일 오후 생방송 <김광현의 탕탕평평> 프로그램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으로 남파된 특전사가 있다는 내용의 이주성 한반도평화국제연합 대표 인터뷰를 방영했다. 하지만 정작 방송에서는 북한군이었다고 주장한 당사자가 출연하지 않았으며 이 대표가 그의 말을 대신 전달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일베 사이트의 5·18 희생자 비하 게시물
 
이 대표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 특수부대원 50명은 1980년 5월 19일 오후 평양 부근에서 출발해 배를 타고 21일 새벽에 광주 인근 바닷가에 도착했다. 이후 이들은 광주 시민군 행세를 했으며 27일 오전 9시 상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후퇴하면서 남한 특전사 3명을 직접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1988년 신동아 12월호에 공개된 1980년 5월 27일 당시 국군 내부 기록을 살펴보면 이 대표의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달랐다. 진압부대로 투입된 육군 보병 제20사단 및 이에 배속된 공수여단의 진압작전기록에는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 재진입 작전을 실시해 새벽 5시 20분 전남도청을, 새벽 6시 20분 YMCA 건물을 점령하고 무장 시위대를 체포하면서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완료했다고 나와있다. 27일 국군 사망자는 2명이었으며, 새벽 6시 30분 이후에는 전투 기록이 전혀 없다.

앞서 지난 13일 TV조선 생방송 <장성민의 시사탱크>에서도 북한 특수부대 장교가 출신임을 내세우는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는 “5·18을 전후로 북한 특수부대 1개 대대 약 600명이 광주에 내려왔다”며 “전남도청을 점령한 것은 시민군이 아니고 북한에서 내려온 게릴라”라고 주장했다.

   
13일 조선 TV에 출연한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
 
하지만 임 대표의 주장은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침투 인원과 침투 방법 등 설명 내용이 달라 일관성이 없었다. 그는 지난 2006년 11월 보수 월간지 한국논단과 인터뷰에서 “북한군의 5·18 침투 인원은 450명이고 모두 서해안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이는 TV조선 인터뷰에서 밝힌 ‘북한 특수부대 600명 침투설’과 다르며 3차에 걸쳐 해상과 땅굴로 들어왔다는 주장과도 배치된다.

종편 ‘5·18 북한군 개입설’은 오락가락·거짓투성이

이와 함께 5·18유족회 등 5·18 관련 단체에 대해서도 일베 회원들을 중심으로 사이버 테러와 명예훼손이 자행됐다. 5·18유족회가 법적 대응을 위해 수집한 명예훼손 자료를 보면 5.18 희생자 시체 사진을 두고 ‘홍어 말리는 중’이라고 비하하거나 희생자 관 앞에서 울고 있는 유족 사진을 보고 ‘홈쇼핑에서 배달될 홍어들 포장 완료’라고 하는 등 모욕적인 표현이 많았다. 여기서 불리는 ‘홍어’는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는 은어이다.

사실 5·18 민주화 운동 희생자를 폭도라고 왜곡·비하하거나 5·18 당시 북한의 지령을 받은 특수부대가 개입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식의 주장은 새로울 것이 없다. 1980년 민주화운동 당시부터 국회 광주청문회를 거쳐 5·18특별법이 제정되고, 5·18 국가기념일 지정 이후에도 폄훼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최근 들어 더욱 심해졌을 뿐이다.

오승용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에 따르면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만들어 유포한 것은 5·18 항쟁의 강경 진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이었다. 신군부는 5·18 왜곡의 최초 생산자로서 5·18 항쟁 이전부터 북한의 남침 위협을 강조하는 한편, 5·17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의 명분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오 교수는 “신군부는 5·18 항쟁이 발발하자 이를 불순분자의 선동에 의한 시민폭동으로 규정하고 계엄군의 살인적인 진압은 은폐했으며, 시민들의 정당한 저항은 왜곡했다”며 “실제로 현재 보수 세력들이 주도하는 5·18 왜곡 담론들은 북한 특수부대 침투를 제외하면 대부분 1980년 5·18항쟁 당시 신군부가 생산·유포했던 내용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수 세력의 5·18 왜곡은 신군부의 5·18항쟁 왜곡을 정교화하는 작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설명이다.

지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를 보면 5·18이 발생하고 상황이 악화되자 보안사령부는 광주 현지로 보안사 요원들을 파견했다. 사건 수사를 마무리한 전남합동수사단에서는 ‘광주내란 및 소요사건 수사결과보고 시나리오’를 남겼다. 합동수사단은 5·18의 배경을 △김대중 추종세력의 음모 △주민들의 빈부격차와 지역적인 소외의식에 따른 정부에 대한 비판 △전통적인 야경(野傾)적 기질 등을 배경으로 “10·26 이후 사회혼란과 시위가 난무하자 이를 정권 쟁취의 호기로 판단한 김대중이 광주 학생을 자극해 내란을 유발토록 한 것”으로 호도했다.

신군부 세력은 남파 간첩으로 내려온 이창용(본명 홍종수)도 광주에서의 시위와 연관시켰다. 신군부는 5월 24일 서울역에서 체포된 이창용을 북한이 5·18을 선동하기 위해 남파한 간첩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국방부 보고서에는 간첩 이창용 사건에 대해 “이창용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의하면 (이창용은) 5월 16일 전남 보성을 통해 침투했으며, 광주에서의 시위와는 상관없이 남파됐다. 5·18과 관련한 임무나 광주로 잠입하기 위한 시도도 발견할 수 없다”고 기록돼 있다. 또 이 보고서는 “신군부 세력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관된 것처럼 여론조작을 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밝히고 있다.

신군부가 유포한 5·18 왜곡이 언론·인터넷 통해 확산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은 방송과 신문 등 기성 언론을 통해서도 이뤄졌다. 언론은 신군부의 지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의 조종을 받은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했다. 조선일보는 시위 학생들을 ‘폭도화된 청년들’로 묘사했고(조선일보 1980년 5월 24일자), 경향신문은 시민 항쟁을 ‘불순분자의 난동(조선일보 1980년 5월 26일자)’으로, 동아일보는 광주시민들에게 이성을 찾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80년 5월 26일자).

   
광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을 곤봉으로 제압하는 공수부대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고 1997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후에도 보수 언론이나 극우 논객 등이 중심이 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을 주도했다. 5·18특별법 위헌 논란, 전두환 정권 정통성 옹호, 간첩 침투 등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색깔론 제기가 대표적이다.

이후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온라인을 통한 보수 세력의 5·18 왜곡이 확산됐다. 2009년 5·18연구소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콘텐츠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은 극우 논객 지만원씨가 운영하는 시스템클럽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씨는 2008년 시스템클럽 게시판에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글을 올려 검찰로부터 기소됐으나 올 1월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5·18은 민주화운동이 맞지만 지씨의 비방 행위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아 명예훼손죄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오승용 교수는 “1980년 5·18 항쟁 당시 언론의 왜곡보도를 제외한다면, 1990년대 중반까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 담론의 주요 생산자는 신군부 인사의 개인적 발언이나 일부 보수언론의 근거를 확인하기 힘든 왜곡 보도에 국한돼 있었다”며 “그러나 컴퓨터 통신의 발달과 인터넷의 대량 보급으로 인해 왜곡 담론의 생산은 신군부 세력이나 기성 보수언론에 국한되지 않고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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