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 후 당시 한반도 이남은 이승만·김구·여운형·박헌영이란 정치지도자가 격론을 벌이는 정치의 시대를 겪고 있었다. 소련과 중국의 영향이 컸던 만큼 사회주의에 대한 인민의 관심 역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1947년과 1949년, 각각 여운형과 김구가 암살당하며 남쪽엔 극우와 극좌만 남았다. 당시 이승만은 극우, 박헌영은 극좌를 대표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박헌영은 월북했고, 이승만은 남한 초대 대통령이 됐다. 전쟁 이후인 1953년 박헌영은 북한으로부터 미국스파이로 몰려 사형됐다.
이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체제를 거치며 남한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잃어버렸다. 박헌영이란 인물 역시 잊혀졌다.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체제에서도 박헌영은 ‘반동분자’로 역사에서 지워졌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은 남과 북 양쪽에서 패했다.
언론인 손석춘은 저서 <박헌영 트라우마>를 통해 한반도에서 ‘박헌영’을 복원하자고 말한다.그는 책에서 “남과 북 모두 박헌영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남북통일이 이뤄지기 어렵다”고 밝혔다.
▲ 박헌영 트라우마 / 손석춘 / 철수와 영희 / 13000원. | ||
저자는 ‘박헌영 트라우마’를 “거짓말로 상대를 크게 해코지한 사람에게 남는 상처”라고 정의한 뒤 “북한은 남쪽에서 탄압을 피해 올라간 사회주의자들을 미제의 간첩으로 몰아 체포한 과오를 통 크게 바로잡기 바란다”고 밝힌다.
저자는 해방 직후였던 1945년 8월 20일 작성된 박헌영의 ‘8월 테제’에 주목한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자격으로 그해 11월 30일 서울중앙방송(현 KBS)에서 8월 테제를 연설했다. 박헌영은 “토지개혁,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남녀동등의 선거, 8시간 노동제 실시 등 실질적 민주주의 실현을 통해 소수특권계급인 지주 자본가와 고리대금업자의 전횡에 주권을 빼앗겨선 안 될 것”이라 밝혔다.
박헌영은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공장·운수·은행을 국유화하고 여성의 역할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사회보험법과 최저임금제 실시 등 사회주의 국가모델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우경적, 극좌적 경향을 극복하고 노동자·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를 요구했다.
손석춘은 책에서 “북은 김일성의 손자가, 남은 박정희의 딸이 통치하는 상황을 맞은 지금 박헌영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와의 대화는 절실하고 절박하다”고 강조한다. 박헌영의 복원을 통해 현재 남한사회와 북한사회가 갖고 있는 모순과 한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한반도의 사회적 상상력이 한 단계 열린다면 그의 죽음이 지금보다는 덜 외로울 것 같다.
▲ 이정 박헌영 선생. | ||
박헌영은 1900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경성고보(현 경기고)를 나왔다. 1920년대 서울에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식민지 해방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나섰던 그는 기자들과 동맹파업을 벌이며 해직된 전력이 있다. 1927년 체포됐으나 자신의 똥을 집어먹는 미친 연기로 풀려났고, 이후 소련으로 탈출해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 호치민 등과 함께 공산주의이론을 공부하며 조선공산당 건설의 중심인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