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험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안정적인 대학을 나와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안정적인 배우자를 얻어 안정적으로 사는 것을 ‘강요’당한다. 체제에 순응하며 남들만큼 살기에도 쉽지 않은 세상이기 때문에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것은 어렵다. 물론 과거에도 모험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적어도, 바다는 달랐다. 인간에게 바다는 매 순간이 모험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해류, 바람, 기후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나침반과 별자리에 의지하며 망망대해를 헤치며 미지의 항로를 만들어간 무수한 도전들은 결국 15세기 대항해시대를 열고 오늘날의 문명을 일궈냈다. 바다는 두렵지만 그만큼 자유로운 곳이었고, 모험과 기회의 공간이었다.

대항해시대는 역설적으로 지중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럽문명을 꽃피운 것은 흑해와 에게해, 아드리아해를 지나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는 지중해의 바다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로마시대와 중세,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지중해 구석구석을 누볐고, 이윽고 지브롤터해협을 벗어나 대서양으로 나아갔다.

바다사람들은 장사꾼부터 선원, 탐험가, 노예, 해적과 해군 등 다양했다. 이들이 바다로 나아간 목적은 저마다 달랐지만 그들이 바다에서 이뤄낸 일은 모두 육지와 연결돼 세상을 변화시킨 공통점이 있다. 옥스퍼드대 역사학 교수인 저자는 이처럼 지중해를 넘나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이 책은 역사학도라면 차분히 읽어볼만 하지만, 일반인이 느끼기에는 지중해사 자료집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지중해문명을 정치·경제·문화로 나누거나 구조적으로 분석하는 대신 인물과 연대기 중심으로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첫 장부터 끝장까지 다 읽어 지중해사를 꿰뚫겠다는 야심은 버리는 게 좋다.

바다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굉장히 구체적이다. 예컨대 1538년 에스파냐 함대 소속 시칠리아 갤리선 노잡이들이 하루에 비스킷 26온스, 일주일에 세 차례 고기 4온스, 일주일에 4일 스튜를 제공받고 선원들이 병아리콩을 좋아했다고 서술하는 식이다. 때문에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지칠 수 있다.

역사란 우거진 나무와 같아, 정작 숲 전체를 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현명한 독자라면 저자와 상반된 역사분석틀을 갖고 있는 페르낭 브로델의 주장을 함께 공부하는 것이 좋다. 저자 또한 시종일관 브로델에게 맞서는 점이 인상 깊다.

저자는 “페르낭 브로델은 ‘모든 변화는 느리게 진행된다’와 ‘인간은 운명에 속박되어 있다’는 사상을 갖고 있다”며 그의 구조주의 역사학을 비판한 뒤 “이 책(‘위대한 바다’)은 지중해를 넘나든 인간의 경험과 바다를 생계로 삼은 인간의 삶을 부각시킨다. 인간의 힘은 한층 더 지중해 역사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말은 타당하다. 그는 “지중해의 역사를 몇 가지 공통 요소로 묶으려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런 시도는 지중해를 오간 사람들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다”며 “지중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통찰력 있는 개인에 의해 변화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위대한 바다 / 데이비드 아불라피아 저 / 이순호 역 / 책과 함께 펴냄
 
하지만 우리가 흔히 세계사 수업 때 공부했던 왕 중심의 정치사를 하나의 사건으로 치부하고 대신 지형이나 바람, 해류, 기후, 식량 등과 같은 환경적 특성이 지중해 역사를 결정짓는 주원인이었다고 분석하는 브로델의 분석 또한 흥미롭다. 지중해는 1500년대 대항해시대와 수에즈운하가 생긴 1850년대를 전후로 쇠퇴했다. 이는 분명 사람의 문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모험이 사라진 시대’에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지중해는 지구상의 색다른 사회가 서로 활발하게 교류했던 자유의 공간이었다. 지중해는 그리스인의 바다였고 로마의 바다였고 이슬람의 바다였고, 해적의 바다였다. 지중해는 다른 대양이 넘볼 수 없는 역할들을 수행하며 인류문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모두 모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험이 없는 시대는 진보할 수 없다. 지중해문명 2만년이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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