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친구들을 만나러 나온 강남역. 이런저런 사는 얘기, 회사 얘기, 이성친구 얘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술잔을 기울이다 어느덧 시간은 훌쩍 자정을 넘었다. ‘아뿔싸, 지하철은 끊겼고 여긴 택시도 잘 안 잡히는데…’ 요일이 바뀌어 가는 강남역 번화가 대로변은 그야말로 택시 잡기 전쟁이다. 평상시 널리고 널려 있던 그 많은 택시는 다 어디로 갔을까. 

승차거부로 신고한다고 협박을 해도 별수 없다. 택시기사들에게 강남역의 주말은 ‘대목’이다. 이런 날 돈을 벌지 못하면 그야말로 ‘허탕’이다. 택시기사들이 손님을 가리는 이유는 허탕을 치지 않기 위해서다. 이왕이면 돈이 되는 장거리 손님을 태우고 또 다른 승객이 있는 곳으로 가야 그나마 밤새워 일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회사에 매일 돈 갖다 바치고 가스 충전하고 나면 남는 것도 없어요” 서울의 어중간한 곳(?)에 사는 내가 간신히 잡아탄 택시기사의 말이다. 사실 예전에는 택시기사들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다 장삿속이고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회사 택시 종사자들에게 일명 ‘사납금’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 나를 수차례 지나쳤던 택시 기사들을 마냥 원망할 수는 없었다. 사납금이란 택시 기사들이 회사로부터 택시를 배정받는 대가로 매일 내야 하는 일정한 금액을 말한다. 택시회사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서울 시내 대부분 사업장에선 10만 원 이상의 사납금을 요구한다.

   
▲ 3월 9일 MBC 무한도전 방송분 '멋진 하루' 편 중 갈무리.
 
 
문득 지난 9일 MBC에서 방송된 <무한도전> ‘멋진 하루’ 편이 생각났다. 7명의 <무한도전> 멤버들이 1일 택시기사가 되어 직접 택시를 몰며 시민들을 만나 웃음을 선사하는 내용이었다. 시민들에겐 깜짝 놀랄 만한 멋진 하루였겠지만 사실 멤버들은 시작부터 손님을 태우기 위해 초조해했다. 사납금 10만 원을 채우지 못하면 자기 돈으로 부족분을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날 무한도전 멤버들은 10시간 동안 택시를 운행했지만 손님을 가장 많이 태운 박명수가 8만9800원을 벌었다. 그래도 사납금에 1만4200원이나 못 미치는 액수다. 꼴찌 정형돈은 하루 종일 3만2600원밖에 벌지 못했다. 이들이 직업 기사가 아님을 감안해도 택시 노동자들에게 사납금이 얼마나 큰 부담임을 짐작할 수 있다.

법원, 사납금제 강요 택시회사 불법인정 “손해배상 하라”

문제는 이처럼 부당하지만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납금 제도가 사실은 법에 위반된다는 점이다. 현행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은 택시기사가 이용자에게 받은 요금 전액을 사용자에게 납부하고 사업자는 이를 수령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국토해양부 훈령인 ‘택시 운송 수입금 전액관리제 시행요령’에도 일정 금액의 운송 수입금 기준액을 정해 사업자와 택시기사가 협의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사업장 대부분에서 택시 기사들이 사납금을 내용으로 하는 근로계약 체결을 강요당하고 있다. 택시회사에서 사납금이라는 안정적인 수입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납금을 비공식적으로 처리하면 세금도 안 내고 4대 보험, 간접비용도 발생 안 하거든요. 택시업체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탈법이 가능하고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오니까 기사 수가 늘어날수록 이익이죠”

서울시에서 택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한 일선 공무원의 말이다. 만약 택시기사가 사납금을 거절하는 경우에는 계약을 체결하지 않거나 온갖 불이익을 줘서 결국 사납금제에 서명하도록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최근 윤지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회사의 사납금 강요를 꿋꿋하게 버텨내다가 온갖 불이익을 입은 택시기사 4명을 대리해 진행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했다. 법원은 지난달 21일 회사의 불법행위를 인정하고 원고들에게 각 1000만 원 가량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회사가 사납금제를 전제한 개별 근로계약을 체결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배차 시간 단축, 자율근무제 폐지 등 각가지 불이익을 주고 정리해고를 시도했다는 게 판결의 이유다.

윤 변호사는 “2011년 5월에 제기한 소송은 1심에서만 무려 1년 8개월 넘게 진행되면서 그 사이 두 분은 징계해고를 당했고 한 분은 정년을 이유로 퇴사를, 다른 한 분도 징계를 못 이겨 결국 자진 퇴사 했다”며 “하지만 상대방이 항소를 했고 대법원까지 가면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몇 년은 더 걸릴 수 있는데 지급 결정된 손해액도 확정판결 전까지는 받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는 사건을 맡은 변호사로서도, 수입이 전혀 없는 해고 택시기사 처지에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박원순 시장 전액관리제 약속…서울시 “강제권한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2011년 후보 시절부터 “회사택시의 사납금 문제를 개혁하고 택시수급 불균형 개선, 택시의 경쟁력 및 투명성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부응해 서울시에서도 전액관리제 전면 시행 등을 담은 택시개혁 종합대책을 수차례 발표하고 통합형 디지털운행기록장치 설치 등 기술적 체계를 갖췄다고 하지만 현실은 아직 데이터 수집과 분석 단계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과연 공언한 대로 서울시가 올해 안으로 전액관리제 정착과 합리적인 임금체계 대안을 제시할 추진력을 갖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이태경 서울시 택시정책팀 주무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행정력을 동원해서 영업정지와 재정지원 등 행정처분을 통해 전액관리제를 유도할 수 있지만 직접 강제할 수 있는 물리적 권한은 없다”며 “회사와 운수종사자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기가 굉장히 어려운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관할관청은 운송사업자 및 운수종사자가 전액관리제를 성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위반행위 등 택시의 불법행위에 대해 철저히 지도·감독해야 한다’는 정부 훈령이 허울뿐인 현실은 오늘도 택시기사로 하여금 죽음의 질주를 달리게 한다. 사납도록 멋진 하루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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