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8일로 예정된 KBS 봄 개편에 편성된 한국현대사 프로그램(가칭 <그때 그 사람>)이 박정희 유신독재 역사를 미화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가 입수한 <그때 그 사람> 기획안에서는 논란 가득한 아이템 다수가 발견됐고, 제작을 맡은 외주사 대표와 길환영 사장과 사적관계가 외주제작계약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해당 외주제작사가 KBS측에 제출한 <그때 그 사람> 기획안에 따르면 △10월 유신 △새마을운동 △윤이상 △육영수 여사 피습 등의 아이템이 포함됐다. ‘10월 유신’ 관련 기획안에는 “13.8%에 달했던 경제성장률은 1972년 5.8%로 급락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강압적인 자원분배가 필요했고 철권이 요구되었다”고 언급했다.

이 같은 표현은 유신독재가 경제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뉘앙스로 읽게 만든다. 박근혜 정부에서 KBS가 해당 아이템을 공정하게 다룰 수 있을지를 물었을 때는 회의적 시각이 많을 수밖에 없다.

KBS본부는 이어 “현재 프로그램제작을 맡은 외주사 대표 J씨의 형이 KBS 공채9기로 입사한 PD출신이고, 길환영 사장은 공채 8기다”라면서 “자격 없는 외주사에게 논란의 가능성이 큰 현대사 프로를 맡긴 배경에 이런 ‘사적관계’가 영향을 미친 건 아닌지 의심된다”고 밝혔다. <그때 그 사람>을 담당한 외주사 대표 J씨는 19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언론노조와 민족문제연구소, 언론연대 등은 19일 서울 여의도 KBS본관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길환영 사장이 외주제작사를 통해 추진하는 ‘박정희 미화’ 프로그램 정규 편성 방침을 규탄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이처럼 이번 봄개편을 두고 논란이 불거지자 언론노조 및 언론시민단체는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개편안에 대해 우려했다. 윤성도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정책실장은 이번 개편이 2008년 이후 최악의 개편이라고 지적했다. 윤 실장은 “이명박정부 취임 당시였던 2008년 이병순 사장은 탐사보도팀을 없애고 <미디어포커스>와 <시사투나잇>을 없앤 뒤 대통령 주례연설을 실시하는 등 막장 개편에 나선 바 있다”고 전한 뒤 “박근혜정부 들어 첫 개편인 이번 개편에선  KBS라디오 <열린토론>이 폐지되고 <뉴스라인>이 11시 30분으로 밀리는 등 보도기능이 위축되고 역사왜곡 현대사프로까지 편성되며 2008년 이후 최악의 졸속개편으로 기록될 상황”이라고 밝혔다.

김현석 KBS본부 노조위원장은 이번 논란이 단지 현대사 프로그램 하나의 공정성 여부에 국한될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김현석 위원장은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하고 있다. KBS는 정권의 아부꾼으로 남을지, 정권을 감시하는 공영방송으로 남을지 갈림길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박석운 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는 “유신시절 퍼스트레이디로서 독재정권의 공범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유신시대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 등장하는 것은 대통령 맞춤 찬양프로그램으로밖에 볼 수 없다. KBS가 이 방송을 내보내면 국민들은 수신료를 낼 필요가 없다고 나설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은 “민족을 배반한 박정희를 있는 그대로 전해야 역사가 정화되는데 거짓된 방송으로 국민을 속이는 것은 큰 재앙”이라고 우려했다.

KBS는 수년 전 백선엽 장군과 이승만 전 대통령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친일파·독재자 미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때문에 언론사회단체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 KBS는 19일 공식입장을 내고 “개편을 저지하겠다는 입장은 편성권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다. 현대사 프로그램 신설이 특정인의 미화가 우려된다는 지적은 지나친 예단”이라고 해명했다.

KBS는 “현대사는 그 대상이 1945년에서 2013년까지 68년이나 된다. 세대 간 대화와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데 (현대사 프로그램의) 기획의도가 있다”고 밝힌 뒤 “공정성에 대한 시비를 해소하기 위해 학계에서 존경받는 학자로 구성된 자문단 운영을 검토하고 사내 사전 심의도 강화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열린 토론> 폐지를 두고는 “종합편성채널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청취자들에게 듣는 재미를 줄 수 있도록 하자는 전략에 따른 것”이라 밝혔다. KBS는 노조가 제기한 외주제작사 J씨와 길 사장과의 ‘사적 관계’ 의혹에 대해선 “입장을 밝히지 않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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