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시카고 불스가 NBA 리그를 ‘씹어 먹고’ 있을 당시, 최고 인기스타는 마이클 조던과 데니스 로드맨이었다. 조던은 리그 NO.1 스코어러였고, 로드맨은 NO.1 리바운더였다. 둘의 기이한 공생은 72승 10패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낳았고, 만화 <슬램덩크>에서 서태웅과 강백호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농구팬에게 1990년대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북한의 김정은에게도 1990년대는 질풍노도의 시기였을 것이다. 해외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만큼 농구와의 만남은 자연스러웠다. 아마 로드맨의 경이적인 보드 장악력에도 열광했을 것이다. 리바운드왕을 동경했던 그는 세월이 흘러 아버지를 따라 핵실험을 하는 북한의 제1 권력자가 됐다.

데니스 로드맨이 묘기농구단 ‘할렘 글로브트로터’ 일원으로 2월 26일 평양에 도착했을 때 NBA마니아 김정은의 마음은 두근거렸을 것이다. 로드맨이 28일 평양 유경정주영체육관에서 김정은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농구 경기를 관람한 사실은 김정은의 농구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안정식 SBS북한전문기자(북한학 박사)는 “조선중앙TV기록영화를 보면 부인 리설주는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앉아있고, 김정은은 계속 로드맨과 이야기를 하는 등 농구에 대한 개인적 관심이 높아보였다”고 전했다.

   
▲ 중앙일보 3월 2일자 3면 기사.
 

중앙일보는 2월 27일자 기사에서 “(김정은이) 스위스 유학 시절 로드맨을 동경해 등번호 91이 새겨진 시카고 불스 유니폼을 입고 농구경기를 즐긴 일화는 유명하다”며 둘의 만남에 초점을 맞췄다.

어찌보면 이번 만남은 한 때 시카고 불스 팬이었던 북한의 권력자가 개인적 호기심으로 로드맨을 직접 만나 본인의 힘을 과시하며 다소 ‘격한’ 환영을 한 사건에 불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론은 김정은과 로드맨의 만남에 주석을 달며 정치·외교적 의도에 주목했다.

한국일보는 2일자 지면에서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발언을 인용해 이번 로드맨과의 만남을 두고 “북한이 폐쇄적이지 않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겼을 것”이라 분석했다.

김근철 아시아경제 뉴욕특파원은 4일자 지면에서 “최근 방북했던 빌 리처드슨 전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와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 일행도 면담엔 실패했다. 로드맨은 의젓하게 평양에서 국가 정상급 외교를 펼쳤다”고 평가한 뒤 로드맨에 대한 김정은의 환대가 “시카고 불스의 열성팬이었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김근철 특파원은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김정은은 로드맨을 품에 안으며 미국 정치권과 여론에 미묘한 틈새를 만들어 체제의 안정성을 부각시키려 했다”고 분석했다. 실제 로드맨은 귀국 직후 미국 ABC와 인터뷰에서 “김정은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바마 대통령과의 전화 한 통”이라고 말했다.

   
▲ NBA 최고의 보드장악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맨.
 

이를 두고 언론은 로드맨이 김정은의 환대에 화답하며 평양의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시카고 불스의 열성팬으로 유명한 오마바 미국 대통령이 언급되며 북·미간 ‘스포츠 외교’ 가능성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로드맨이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이 농구를 좋아한다길래 오바마 대통령도 농구를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밝히면서 증폭됐다. 

여기에 더해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과 달리 미디어를 적극 활용해 현대적 지도자로서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는 기존 평가가 더해지며 뉴욕타임즈 등 외신은 “로드맨의 방북은 좋은 북한 선전의 계기였다”고 평가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로드맨 방북과 환대는 철저히 정치적으로 계산된 것이다.

체제비판도 빼놓지 않고 등장했다. 중앙일보 이영종 기자는 3월 4일자 취재수첩에서 이번 사건을 “두 악동의 만남”으로 표현한 뒤 “(친선경기장) 테이블에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코카콜라가 놓여있고 로드맨의 모자에 USA가 크게 쓰인 것을 주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할지는 안중에 없는 듯했다”고 비판했다.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로드맨의 방북을 두고 언론의 관심이 높아지자 “북한 정권은 유명 스포츠 인사를 활용한 이벤트에 돈을 쓰기보다는 굶주리고 감옥에 갇히고 인권이 보장되지 못한 북한 주민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밝혔다. 

모두 김정은이 북한 최고 권력자가 아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내용이다. 미국에서 농구경기를 볼 수 없는 농구마니아 김정은 입장에서 로드맨과 만남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그를 환대했고, 전성기가 끝나고 각종 추문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생을 겪고 있던 로드맨 입장에선 국가 원수급 대우를 받으니 저절로 외교관을 자처하게 된 셈이다. 

즉 ‘리빙 레전드’에 대한 농구팬(김정은)의 예우는 파격적이었고, 흥분한 로드맨은 만찬장에서 김정은에게 90도 인사를 하는가하면,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아마도 북한에 있는 동안 강남스타일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글을 올리며 한반도에 대한 무지를 과시했다. 북한 핵실험 이후 기사거리가 없던 언론은 로드맨을 물었다.

어쩌면 이번 만남은 “현 세계 최고의 공격수(김정은)를 막아낸 로드맨, 역시 수비왕 다운 면모”라는 누리꾼의 촌평이나 “마이클 조던을 북으로 보내자”는 장난 섞인 주장들이 어울리는 해프닝에 불과할 수 있었는데 특별한 한반도 정세 때문에 부풀려 분석된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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