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슬램덩크>를 보면서 고교 넘버원(NO.1)과의 대결을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슈퍼루키와 가진 ‘꿈의 대결’은 처참했다. 키 190cm로 고교시절부터 10년간 다져온 동네농구 ‘짬밥’이면 아무리 아저씨가 되었어도 1점은 넣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불쑥 1대1 시합을 제안했다. 그러나 13일 오후 서울 선일여고 실내농구장에서 만난 신지현(선일여고 3학년, 174cm, 18세)선수의 외각 슛은 정확했고, 몸놀림은 가벼웠다. 반면 허우적대는 기자의 몸부림은 ‘개똥슛’으로 이어졌다. 신 선수의 슛은 깨끗하게 림을 갈랐다. 3점내기 결과는 3:0이었다.

2013 WKBL총재배 대회서 한 경기 61득점… 농구 역사상 최고득점 신기록

신지현 선수는 대한민국 여자고교농구계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2013 WKBL 총재 배 춘계 전국여자중고농구대회가 열렸던 지난 1월 26일, 선일여고는 8강에서 대전여상을 만나 83대 75로 승리했다. 이날 신지현 선수는 무려 61득점(14리바운드)을 기록했다. 팀 득점의 76%였다. 남녀를 포함해 한국고교농구 역사상 최고득점 신기록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미 ‘초고교급’이란 평가를 받아왔던 그녀가 또 한 번 실력을 뽐낸 순간이었다.
 

   
선일여고 신지현 선수
이치열 기자 truth710@
 

신 선수는 이날 경기에서 고감도의 3점 슛을 연이어 성공시켰고, 파울작전으로 얻어낸 자유투 득점도 18점을 기록했다. 신지현 선수는 “이번 대회에서 전체적으로 슛 감이 좋았어요. 그날은 유독 다른 친구들이 안 풀렸고, 센터가 5반칙으로 퇴장당하면서 공격적으로 게임을 풀어갔는데 정말 잘 풀렸어요. (경기가 끝날 때까지) 61득점을 한지도 몰랐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메인포지션이 포인트가드(PG)이지만 이날은 슈팅가드(SG)로 맹활약했다. <슬램덩크>로 따지면 북산고교의 송태섭이 정대만으로 변신한 순간이었다.

선수가 단 6명에 불과한 선일여고는 이번 대회에서 예선전 4경기를 포함해 준결승까지 무려 6게임을 하루도 쉬지 않고 뛰어야했다. 결국 준결승에서 석패했고, 61득점은 잊혀졌다. 신 선수의 대기록은 농구전문지 <점프볼>을 제외하곤 언론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점프볼>이 올린 신 선수의 61득점 동영상은 몇몇 농구 마니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지만 기성언론은 이를 지나쳤다. 아마고교 여자농구에 대한 언론의 관심수준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지금보다 진짜 잘해서 농구 알리면 언론들도 그땐 달라지겠죠”

하지만 신 선수는 대수롭지 않은 눈치였다. 그간 언론의 ‘무관심’에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친구들이 처음엔 (스코어를) 잘못 본줄 알았다가 나중엔 ‘대박’이라면서 연락이 왔어요. 그래도 이번 건은 많이 알려진 것 같아요”라며 만족한 탓도 있다. 보통 농구경기장에 기자는 없다. 신지현 선수는 “경기장에는 보통 양쪽 팀의 부모님만 계시고, 시합과 관련된 스텝만 계셔서 편하게 게임하고 있어요. 결승전 정도는 돼야 사람이 많아요”라고 말했다. <슬램덩크>에서 고교농구에 환호하는 관중은 만화에서만 존재한다.

고교농구선수가 지금까지 봐온 언론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농구를 별로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요. 농구전문지 외에는 (기사를 쓰는 곳도) 없어요. 크게 잘하는 경우가 아니면 기사를 잘 안 써주시는 것 같아요.”(웃음) 그녀는 “사람들이 몰라줄 때는 좀 더 관중도 많았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지금보다 진짜 잘해서 농구를 알리면 좋겠어요”라고 밝혔다. 결국 스포츠는 관중이 와야 하고, 관중은 선수가 끌어 모은다. 언론이 프로·아마추어 상관없이 선수들의 정직한 땀방울을 담아낸다면 스포츠는 성장하기 마련이다.
 

   
선일여고 신지현 선수
이치열 기자 truth710@
 

신지현 선수는 신문을 통해 선일여고 선배 전주원 선수를 알게 되며 농구를 시작했다. 마침 13일에는 전주원 선수와 만나 개인교습을 받기도 했다. “드라이빙 할 때는 수비를 붙이고 몸을 부딪히며 올라가라고 하셨어요.” 그녀는 고교선수 답지 않은 볼 핸들링과 자연스러운 크로스오버 등을 스스로 익혀온 순수 ‘국내파’다. 어릴 때부터 달리기가 빨랐다. 농구는 11살부터 시작했다. 오전 연습 2시간, 오후 연습 3시간을 하고나면 야간에 개인 운동을 했다. 항상 농구경기를 틀어놓고 무심코 보면서 나중에 해봐야지, 하고 연습을 해왔다.

미국과 시합에서 80점 넣고도 석패했는데… 오히려 한국 누리꾼들은 “헤엄쳐 와라”

신지현 선수는 “한 명씩 뚫고 골을 넣는 순간에는 신이 나요. 슛을 쏠 때 들어가는 느낌이 좋아요. 이번 대회에선 전반전 종료를 3초 남기고 동료의 패스를 받아 바로 던져 슛이 들어가기도 했어요”라며 신나게 웃었다. 16세부터는 국가대표로 세계대회 경험을 쌓아갔다. 16세에 첫 출전한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선 중국을 꺾는 이변을 일으키며 세계대회 출전권을 획득했다. 신 선수는 “중국과 예선전에서 40점차로 졌는데, 준결승에서 1점 차로 이겼어요. 그래서 (세계대회) 티켓을 얻었죠. 그게 십 몇 년 만의 승리였는데 그때도 이슈가 안 됐어요”라며 아쉬워했다.

그 때 만났던 중국선수들 몇몇과는 지금도 연락 하는 사이다. “대회에서 만나 장기자랑을 하다보면 친해져요. 중국 어플리케이션을 받아 서로 영어 쓰면서 연락을 주고받아요.” 17세에 경험한 세계대회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세계대회에서) 미국과 첫 게임을 했는데, 그 때 우리가 정말 잘 했어요.(웃음) 그 친구들은 우리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었는데 미국을 상대로 팀이 80점을 넘었거든요. 그 때 다들 슛이 터졌어요. 미국에게 40점 차이로 졌지만 선수들 모두 그 정도면 나름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인터넷 포털 댓글을 보니까 ‘헤엄쳐 와라’는 악플이 있더라구요. 다들 웃고 말았죠.”
 

   
선일여고 신지현 선수
이치열 기자 truth710@
 

<슬램덩크>의 추억은 가슴에 아련하지만 정작 고교농구에는 악플보다 무관심한 경우가 많은 현실이다. MBC 드라마 <마지막승부>와 대학농구가 한창 인기를 타던 때가 벌써 20년 전이다. 신지현 선수는 “왜 농구 인기가 시들해졌을까요. 옛날 농구 대잔치 보면 관중이 꽉 차있던데…”라며 정말 궁금한 듯 물었다.

“프로 선수로, 국가대표도, 성숙한 여자로도 꾸미고파”… 꿈많은 18세 소녀

그녀는 “농구를 엄청 잘해 스타가 생기면 이슈가 되니까 많이 (여자농구를) 알아봐주실 것 같아요. 열심히 해서 스타가 돼야죠”라며 포부를 드러냈다. 그녀는 올해 여자프로농구 드래프트에서 상위권으로 선발 된 뒤 프로 선수로 성장해나가는 게 꿈이다. “국가대표도 뛰고 싶어요. 또 성인이 되면 여자처럼 꾸미고 살고 싶어요. 하도 짧은 머리만 하다보니까…” 단발머리가 아쉬운 18세 소녀는 꿈이 많았다.

프로농구선수를 준비하는 이들에겐 공통의 고민이 있다고 했다. “아마와 프로 차이가 크다보니까 이미 프로에 진출 해있는 언니들이 무섭기도 해요. 가장 큰 고민은 체력과 스피드에요. 프로에 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해야 해요. 지금은 다들 농구만 생각해요.” 삶이 일 방향으로 정해진 것이 부담되지는 않을까. “친구들은 ‘너는 길이라도 정해져 있어서 부럽다’고 해요. 아직 꿈을 정하지 못한 친구들이 많거든요.”

신지현 선수는 <슬램덩크>의 캐릭터 중 능남 고교의 천재 포인트가드 윤대협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득점도 좋고, 시야도 넓고, 무엇보다 잘 생겨서다. 등번호도 윤대협과 같은 7번이다. 이날 기자에게 ‘팬서비스’ 차원에서 3점내기에 응해준 신 선수는 다시 동료들과 함께 봄훈련을 시작했다. 농구코트 한 편에는 슈팅 기록지가 있었고, 다른 한 쪽엔 대학 원서에 넣을 자기소개서 종이가 놓여있었다. ‘끼익-끼익’. 코트는 많은 이들의 꿈을 담아 쉼 없이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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