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노동조합이 창립 25년 만에 노조 사무국장 공석(空席)이라는 유례없는 위기를 겪고 있다. 25대 조선일보 노동조합이 출범한 건 2012년 11월 12일이다. 7일 기준으로 88일 째 노조 전임자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내 공동체의식이 줄어들며 노조 전임자 자리마저 기피하는 상황이 왔다는 내부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조선일보 노조 이·취임식에는 이정도 신임 노조위원장과 방상훈 사장, 양상훈 편집국장 등이 참석했다. 하지만 정작 있어야 할 사람 한명이 보이지 않았다. 노조 사무국장이었다. 조선 노조는 위원장과 사무국장 두 명이 전임자로 활동해왔다.

1988년 민주화당시 출범한 노조는 현재 209명의 조합원이 있다. 대부분이 기자라서 ‘기자노조’다. 노조 전임자는 한 기수 식 내려오며 배출시킨다. 순서에 따라 이번 사무국장은 43기 조합원 가운데 뽑아야 한다. 하지만 모두 사무국장을 고사하고 있다. 43기 조합원 6명(김은정·박유연·신은진·이용수·정지섭·허윤희) 중 3명은 해외연수 예정자고, 2명은 입사 1년이 채 안 된 경력기자다.

노조는 노보를 통해 “선후배 조합원들은 우리 조직이 점점 모래알이 돼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며 걱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11월 16일자)고 밝히는가 하면, “사정은 이해하지만 상황에 맞춰 공동 연대책임의식을 발휘해야 하지 않나”(12월 7일자)라며 43기의 ‘결단’을 촉구했다.

하지만 43기 6명은 끝내 사무국장을 정하지 못했다. 결국 노조는 44기에게 공을 넘겼다. 그러나 44기 역시 “이전 선배들도 똑같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했다”며 43기 선배기수를 공개 비판했다.

44기는 12월 14일자 노보에 입장을 내고 “43기의 노조 사무국장 선출 불발엔 명분이 없다. ‘해외연수와 겹친다’ ‘사무국장과 해외연수를 함께하면 2년이나 기자 생활을 못한다’ ‘근무경력이 짧아 사무국장을 맡기 힘들다’는 등 온갖 이유로 합의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44기 일동은 “우리는 만성적인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조합원 중 누구도 일에 쫓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만일 한 기수를 건너뛰는 선례가 생긴다면 어느 기수가 노조위원장이나 사무국장을 맡으려하겠느냐”며 “지금 (43기가) 손을 뗀다면 선후배들과의 관계는 영영 어그러질 것”이라 우려하기도 했다.

   
▲ 서울 태평로 조선일보 사옥.
이치열 기자 truth710@
 

양상훈 조선일보 편집국장 또한 지난해 노조 송년회 자리에서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빨리 위원장의 짝을 찾아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무국장이 계속 공석으로 남을 경우 경영진이 전임자 축소를 요구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사주의 영향력이 강한 구조에서 경영진의 건전한 견제세력이 돼야 할 노조가 결집은커녕 와해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강도높은 노동환경에 부당함을 호소하려 해도 노조 같은 조직이 없으면 기자들은 파편화된 개인으로 숨죽여 일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조선 노보에 따르면 한 조합원은 “일부 부서장들은 자기 식구 한 명 빠지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해 그것이 당사자들에게 무언의 압박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고 말했으며, 또 다른 조합원은 “우리들이 애써 보지 않으려 하는 조선일보 기자들과 노조의 실상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사무국장이 공석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노조는 조합원들의 요구를 제대로 관철시키지 못하고 있다.

2012년에는 연봉이 동결됐다. 노조 대의원 대부분이 “우리보다 못한 회사들도 다들 인상했다. 동결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지만 노조의견은 힘을 받지 못했다. 임금 인상 대신 조합원들은 특별 위로금 120~170만원(평기자 기준)을 받아야 했다. 최근에는 경영진이 사내 유아학자금 제도를 수정 내지 축소할 의사를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상황은 각종 임단협에서 조합원들의 목소리를 내고 공정보도위원회까지 주기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중앙일보 노동조합과 대조적인 모습이라는 평가다. 조선일보의 한 조합원은 “다들 노동조합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워낙 노동강도가 강해서 다들 자기 일 하기에도 바쁜 상황이다. 정 회사가 싫으면 그냥 나가버리는 구조”라며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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