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하다. 숨을 돌린 것 같으면 또다시 쫓아온다. 격렬한 총성과 일격은 쉴 새 없다. 낙법이 몰아치는 가운데 임기응변으로 주변 도구를 집어 들고 합을 겨룬다. 건물 사이를 뛰어 다니고, 지하철을 아슬아슬하게 피한다. 총구는 어느새 관자놀이를 겨누고 있다. 두 시간 동안의 러닝타임 동안 멜로는 낄 틈이 없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 <베를린>은 액션과 첩보, 그리고 블록버스터를 사랑하는 남성 팬들에게 매력적이다. 어느덧 첩보액션물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맷 데이먼 주연의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 등 ‘본 시리즈’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안정되고 수준 높은 장르물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류승완 감독은 동생인 배우 류승범과 함께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와 <짝패>(2006)에서 이미 한국액션의 진화를 보여줬다. 2013년 신작 <베를린>에선 아낌없는 제작비 투자와 액션의 끝을 보여주겠다는 감독의 열망이 빛을 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감독이 직접 각본을 써가며 극 전개를 꼼꼼하게 연출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우선 감독은 세심하게도 베를린을 영화의 주요배경으로 삼았다. 베를린은 독일 통일(1989) 이전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독과 자본주의 국가였던 서독의 절충지점이자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할 통치되던 역사적 장소다. 한국과 북한 역시 베를린에서 정보전을 벌여왔다. 이곳은 통일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갈등의 전장이었다. 감독은 이국적인 장소를 택하며 첩보물 느낌을 살리는 동시에 역으로 한반도의 긴장관계를 투영해냈다.

   
▲ 영화 '베를린'의 주인공 표종성(하정우 분). 표종성은 첩보액션물의 고전이 된 영화 '본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분단’이라는 한국적 특수성에 맞게 감독이 주인공 ‘표종성’을 캐릭터화 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표종성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의 ‘영웅’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북의 지령을 받고 활동하는 정보요원이다. 그의 적은 대한민국(남한) 국가정보원이지만, CIA, 이슬람 반제국주의 세력, 이스라엘 정보국도 그의 적이 된다. 이는 첩보전이 일면적인 갈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일정부분 반영한다.

감독은 섭외에서도 성공했다. 남북대립을 소재로 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원조 격인 <쉬리>(1997)의 주인공 한석규를 다시 한 번 국가정보요원으로 캐스팅했다. 이 절묘한 캐스팅은 <쉬리>의 한석규가 시간이 흘러 베를린에 등장한 것 같은 오묘한 연속성을 준다. 하정우는 <황해>(2010)에서 남한에 내려와 필사적으로 아내를 찾던 연변노동자를 연기하며 보여준 분노의 눈빛을 떠올리게 하며 영화의 몰입도를 높였다.

특히 하정우가 연기한 표종성은 첩보액션 팬들이 그토록 원해왔던 한국형 ‘제이슨 본’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극중 표종성은 그 누구보다 강인하고, 생존에 능하다. 달리는 차량을 쫓을 때, 지하철역에서 미행할 때, 증거를 찾을 때, 급하게 도망칠 때 등 각종 상황에서 첩보요원으로서의 매뉴얼을 모두 갖추었다. 이성적이면서도 아내(전지현)를 사랑하는 감성적인 면모까지 겸비했다.

하지만 표종성이 제이슨 본의 복제품에 불과하다면 한국 팬들이 열광하지 않을 것이다. 표종성은 첩보요원으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한편 분단의 현실과 권력의 속살을 절묘하게 드러내며 시사점을 남긴다. “우린 결정하는 사람들이 아니야. 우린 따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모범적으로 조국에 충성하지만 위대해보였던 조국이 실은 소수의 권력자 마음대로 놀아나는 곳임을 깨닫는다.

   
▲ 영화 '베를린'의 주인공들. 시계방향으로 하정우, 전지현, 류승범, 한석규. 
 

누구보다 자아성찰에 능했던 표종성이 권력자의 뜻에 의해 스파이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할 때, 그는 김정일·김정은 체제가 실은 인민의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영화는 나아가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지배계급에게 ‘체제’란 단지 통치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며, 권력자의 속성은 남과 북이 모두 똑같다는 불편한 진실까지 보여준다.

‘공화국의 영웅’ 표종성은 자신이 믿어왔던 공화국을 위해, 혹은 아내를 위해 직접 ‘체제’의 중심으로 향한다. 구체제의 몰락은 이처럼 체제를 지탱했던 이들이 모순을 직시할 때 찾아온다.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지만 그의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다. 그가 블라디보스토크 행 비행기표를 끊는 마지막 장면에서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이유다.

영화는 줄거리상 속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영화배우 하정우도 지난 1월 31일 시사회 자리에서 “촬영할 때 감독님께서 2편 찍을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시긴 하셨다. 그 땐 바로 ‘있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류승완 감독처럼 속편을 바라는 이들은 영화 관객 수만큼 점점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영화는 드디어 ‘표종성’이라는 선 굵은 캐릭터를 얻었다. 감독이 표종성을 쉽게 놓아줄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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