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위원회는 요즘 심각한 업무 공백 상태를 맞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 업무가 대부분 새 정부에서 신설될 미래창조과학부로 이전될 계획이라 선뜻 일을 벌일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당장 제4 이동통신 선정 작업부터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전기통신사업법은 신청서 접수 이후 120일 안에 심사를 끝내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그게 다음달 9일이다. 그런데 방통위는 아직까지 심사위원단도 구성하지 못한 상태다.

업계 관계자는 “차기 정부가 제4 이동통신에 대한 입장을 밝힌 바 없어서 지금 결정하기에는 방통위도 부담이 굉장히 클 것”이라고 말했다. 정권 말인 데다 당장 방통위 조직이 어떻게 쪼개질지 모르는 어수선한 상황이라 심사가 제대로 이뤄질까 의문이라는 관측이 많다. 방통위 관계자는 “원칙에 따라 차질 없이 심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면 관련 업무는 고스란히 미래창조과학부로 이관될 가능성이 크다.

뜨거운 쟁점이었던 방송법 시행령 개정이나 지상파 재송신료 협상 등도 논의가 전면 중단된 상태다. 케이블 채널 사업자(PP) 매출액 제한 규제를 33%에서 49%로 확대하는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은 CJ 특혜라는 논란을 의식한 듯 지난 16일 인수위원회 업무 보고에서 누락됐다. 지상파 재송신료 제도 개선 방안도 지난해 말 상임위원들이 격론을 벌였으나 “상당 기간 연구를 해서 다시 의논하는 게 좋겠다”는 이계철 위원장의 말로 무기한 보류된 상태다.

지난 한 달 동안 방통위가 보여줬던 무기력한 모습은 새 정부 출범 이후 방통위의 축소된 위상을 예고하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지난 5년 동안 합의제 시스템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았지만 이런 업무들이 독임제 부처로 옮겨가면 상명하달식으로 일사천리로 처리될 가능성이 크다. 산업 진흥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미래창조과학부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그 과정에서 어떤 가치들이 희생될 것인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인수위는 방통위의 진흥 업무를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전담 차관 조직으로 이전시키고 방통위에는 규제 업무만 남겨둔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방통위에는 공영방송 사장 선임, 공공성 유지, 방송심의, 통신시장 관리감독 등 인허가와 일부 규제 관련 업무만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방송정책국과 통신정책국, 네트워크정책국, 방송통신융합정책실 등의 주요 업무는 모두 미래창조과학부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22일 진영 인수위 부위원장은 “ICT 전담 차관은 방통위의 방송통신융합진흥기능, 행정안전부의 정보화기획 업무, 문화체육관광부의 디지털콘텐츠와 방송광고, 지식경제부의 ICT 연구개발과 우정사업본부까지 넘겨 받는다”고 밝혔다. 콘텐츠(C)-플랫폼(P)-네트워크(N)-디바이스(D)를 총괄하는 정통부의 부활, 그 이상의 ICT 전담부처가 신설되는 셈이다. 유민봉 인수위 간사는 “방통위는 현재와 같이 방송 인허가와 승인 등 규제 업무를 맡게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방송과 통신의 영역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데다 진흥과 규제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지점이 많아 상당한 갈등과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접시 없는 위성방송, DCS 허용을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다. 진흥을 하려면 당연히 허용해야 하지만 규제 차원에서는 케이블 업계나 다른 IPTV 사업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당장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방송으로 볼 것인지 통신으로 볼 것인지도 정리돼 있지 않다.

통신요금 인·허가 제도 역시 요금 인상을 규제하는 성격이 강하지만 진흥 차원에서는 새로운 요금제 도입 등을 검토해야 할 때도 있다. CJE&M 등은 점유율 규제를 풀어달라고 아우성인데 미래창조과학부와 방통위가 다른 입장으로 맞설 가능성이 크다. 규제를 푸는 것이 곧 진흥이 되는 경우도 많고 선발 주자의 독과점을 규제하는 게 신규 사업자를 진흥하는 경우도 많다. 무 자르 듯이 진흥과 규제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된 뒤 후임 이계철 위원장 체제는 사실상 식물 방통위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박근혜 정부에서 방통위는 그나마 방송통신 정책 기능을 모두 내주고 유명무실한 규제 기관으로 전락할 운명에 놓여있다. ⓒ연합뉴스.
 

야당인 민주통합당의 우려와 반발도 거세다.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유승희·전병희 의원 등은 언론대책 특위를 만들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방송 정책을 독임제 부처가 처리하는 경우는 없다”면서 “방송의 진흥과 규제는 반드시 합의제 기구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민주통합당은 당초 ICT 전담 부처 신설을 당론으로 가져갔으나 인수위 발표 이후 방통위 중심의 조직 개편이 필요하다는 데 비중을 두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꿨다.

변재일 민주통합당 정책위 의장은 “방통위가 합의제 중앙행정기관으로 운영되면서 KBS와 MBC 등 공영방송의 이사·사장 선임 업무를 수행하면서 언론의 공정성과 방송의 중립성을 극도로 훼손하는 결과를 목격했다”면서 “민주통합당은 인권위원회 수준으로 독립적이면서도 공정성을 담보될 수 있는 조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인수위의 조직 개편안은 실망을 넘어 매우 위험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김충식 방통위 상임위원은 “인수위가 방송 인허가 업무를 방통위에 남겨두겠다고 한 건 정부조직법과 방통위특별법 개정 과정에서 야당의 협조를 얻기 위한 블러핑(허세)일 가능성이 크다”면서 “당장은 국회 통과가 우선이겠지만 향후 조직 개편이 마무리 되고 나면 방송통신 융합 분야에서 치열한 영역 다툼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뻔히 속이 들여다 보이는 이런 조직 개편안을 야당이 받아들일 것인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통신 업계에서는 정통부의 부활을 반기면서도 “시어머니 둘을 모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푸념이 흘러나온다. 두 부처 사이에 업무 협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관측과 함께 “채찍 없는 당근, 규제 권한이 없는 산업 진흥이 가능하겠느냐”는 회의적인 전망도 나온다. 한 통신 업계 관계자는 “미래창조과학부가 진흥 업무를 전담한다고 하지만 쪼그라든 방통위가 규제 권한을 강화하면서 영향력을 과시해 충돌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과학기술과 방송통신의 결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다. 송희준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수레의 두 바퀴가 다른 속도로 돌면 전복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마라토너와 축구 선수가 함께 달리는 것과 같다”는 비유도 최근 업계에서 흔히 거론된다. “장기적으로 연구개발과 진흥을 해야 하는 과학기술과 발 빠르게 변화를 따라잡아야 하는 ICT 정책이 같이 갈 경우 여러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변재일 의원은 “독임제 부처에 방송통신 분야의 전권을 부여하는 인수위 조직 개편안은 이명박 정부 시절 방통위보다 크게 후퇴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변 의원은 “방통위는 과거 방송위원회와 통신위원회를 결합한 수준으로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방송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광고 정책이나 편성 정책, 코바코와 방송발전기금까지 모두 가져가면서 어떻게 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조준상 공공미디어연구소 소장은 “방통위는 사실상 도장 찍는 기관으로 전락하는 건데 왜 굳이 합의제 위원회를 만들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면서 “규제와 진흥의 분리라는 명분과 달리 방송통신 정책을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독임제 부처에 넘겨줘서 전권을 휘두르게 하고 방통위에는 최소한의 기능만 남겨놓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소장은 “수평적 규제 체계가 도입되고 산업논리의 전면화, 사회문화적 논리의 주변화가 진행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장지호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실장은 “최시중의 방통위에 문제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정치 논리로 방송통신 정책을 주물렀기 때문인데, 통신 사업자들과 그들의 로비에 놀아나는 방통위 관료들은 그걸 방통위가 합의제 시스템이어서라거나 ICT 전담부처가 아니어서라고 둘러대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 실장은 “미래창조과학부가 진흥 정책을 쥐락펴락하면서 방송통신의 공공성과 독립성을 형해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장 실장은 “지상파 의무 재전송이나 KBS 수신료 인상, 방송 주파수 경매 등 업계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사안을 시장 논리를 우선했던 과거 정통부 마인드로 관철시킬 것으로 우려된다”면서 “박근혜 당선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미 레드오션이 된 통신 시장을 그런 식으로 육성할 수 있을 것인지는 심히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장 실장은 “사업자들의 로비에 휘둘리면서 정통부 시절의 실패를 그대로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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