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실패의 연속이다. 성취는 삶의 곳곳에서 드물게 경험한다. 저항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모순에 저항한 사건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실패의 경험은 텍스트로 남아 더디게 모였고 미디어를 통해 전파됐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실패의 반복에도 미래를 위해 숭고한 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다. 몸에 혜성무늬 자국을 지닌 채 태어난 6명의 주인공은 각자의 시공간에서 “실패가 있어야 비로소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장엄하게 전한다.

영화를 연출한 워쇼스키 남매는 전작 ‘매트릭스’에서 거대한 사회모순을 깨닫고 자유의지를 갖게 된 소수의 혁명가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선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계급 간 갈등과 인간의 주체성을 억압하는 장치들을 ‘기시감’과 ‘윤회’라는 키워드로 풀어냈다.
여섯 곳의 시공간을 살아가는 여섯 명의 주인공은 분장을 통해 시공간의 곳곳에서 등장한다. 이 때문에 자칫 영화가 환생을 주제로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소외된 인간이 주체성을 찾아가는 끊임없는 노력의 단편을 겹겹이 모은 것과 같다.

작가, 작곡가, 기자, 혁명가로 대표되는 주인공들은 모두 기록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은 “약한 자는 고기가 되고 강한 자는 먹는다”는 오래된 ‘법칙’에 반대한다. 이들은 시공간이 다른 곳에 살고 있지만 소설과 음악, 신문기사, 영상 등 미디어를 통해 그물처럼 엮여있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서울,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런던을 이어보면 둥그런 띠가 형성된다. 주인공들이 겪는 고난이 둥근 띠처럼 돌고 돈다는 뜻이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한 장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퍼즐 같은 이야기들을 맞춰내야 한다. 1849년 식민지 약탈사업을 벌이던 변호사 애덤 어윙은 태평양 항해 중 흑인 노예를 만난다. 처음엔 식인을 할까봐 노예를 두려워했으나, 그를 동등한 인격으로 받아들이며 생명을 구원받는다. 이후 어윙은 노예해방운동에 나서며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남긴다.

1936년 영국에서 살아가는 로버트 프로비셔는 권위 있는 작곡가 비비안 에어스의 대필자로 부와 명예를 꿈꾸며 역작 ‘클라우드 아틀라스 육중주’를 작곡한다. 그러나 그는 성적 소수자(양성애자)였고, 이를 안 비비안 에어스는 “우리 사회에선 명성이 전부”라며 프로비셔를 업신여긴다. 최고의 작곡가가 되고자 했던 프로비셔는 스스로가 음악이 되어 육중주를 완성한다. 애덤 어윙의 책을 읽은 프로비셔는 “모든 경계선은 초월되기를 기다리는 관습이야. 사람은 어떤 관습이든 초월할 수 있어”라는 유언을 남긴다. 

197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살아가는 기자 루이자 레이는 원자력발전소의 대형 사고를 바라는 석유자본의 음모를 알게 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어느 레코드 가게에서 ‘클라우드 아틀라스 육중주’를 듣게 되는 레이는 “도저히 못할 일이라면, 반드시 해야 한다”며 보도를 통해 수많은 생명을 구원한다.
2012년 영국의 출판업자 티모시는 사채업자를 피하려다 강제로 요양원에 갇힌다. 루이자 레이의 단행본을 읽은 티시는 요양원 동료들과 함께 탈출 계획을 세운다. 그는 “범죄적인 학대의 희생자가 되지 않을 거야”라고 외친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한 장면.
 

2144년 미래국제도시 서울에선 복제인간 ‘손미 451’이 등장한다. 기계와 다를 바 없는 규격화된 일상에 자유의지조차 없는 손미는 우연히 티모시의 탈출을 기록한 영상을 보며 다른 세상을 자각한다.
손미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거대한 시스템에서 과감히 튕겨져 나오는 순간 자유를 쟁취한다. “자유의지를 지닌 패브리컨트(노예)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 영화 속 해방군과 “서열이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22세기의 권력자 모습은 기시감이 들게 한다. 

패브리컨트에게 유일한 미래는 ‘환희’의 순간이다. 하지만 환희의 진실은 절망적이다. “모두 싸워야 해. 필요하다면 죽어야 해.” 손미는 동료들의 죽음을 딛고 진실을 알리는 묵시록을 지구와 우주 거주지에 방송한다. 손미에게 해방의 전제는 투쟁이었다.

손미가 던지는 메시지에는 감독의 의지가 투영돼 있다. “우리의 삶은 우리 것이 아니다. 자궁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 선을 베풀 때마다 새로운 미래가 태어난다.” 너와 내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은 자연스럽게 타자를 평등하게 인식하고 차별과 착취에 저항하게 만든다.

2346년 하와이의 한 섬에서 등장하는 재크리는 원시적인 삶을 살고 있다. 흡사 17세기 근대문명 이전으로 회귀한 상황이다. 식인종 코나족에 의한 약육강식을 피해 재크리는 목숨을 부지하며 손미를 신으로 숭배한다. 하지만 예언가 평의회 소속 매로늠을 통해 손미의 진실을 알게 된다. 이후 매로늠과 함께 지구를 떠난 재크리는 구술로 투쟁의 역사를 전한다.

한 사상가는 “자신이 지닌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문명은 피어난다”고 말했다. 감독은 영화 속 대사를 통해 “자유는 우리 문명의 실체 없는 종소리다. 자유를 빼앗긴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못한다”고 말했다. 자유를 상실한 채 쳇바퀴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유일한 희망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대한 도전’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우리에게 일상에 대한 저항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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