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9일 저녁 대선 출구조사 발표를 보고 많은 이들은 “어! 이건 아닌데!”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저녁 9시까지 텔레비전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답답하고 아팠습니다. 더구나 SBS는 8시 30분께 이미 “박근혜 당선 유력”이라는 자막을 띄우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방송 3사와 유관기관의 고도의 계획된 심리전임을 저는 며칠이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침신문을 보니 어제 저녁 예측 그대로였습니다. 한겨레 곽병찬 논설위원의 “박 당선인의 갈 길, 사람이 먼저다!”라는 제목의 글을 읽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곽 기자님! 대단하세요! 어떻게 밤중에 그 소식을 듣고 이런 글을 쓰실 수 있으세요 대단합니다. 격려를 드리며 건투를 빕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저는 사제이지만 곽 기자처럼 냉정하게 고민하고 글을 쓰기는 어려워 예언자의 기도와 저주 시편 기도를 반복하고 묵상했습니다.

숨 막힐 것 같은 답답함, 억장이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고민하던 끝에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응시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희망을 지니고 부활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희망과 부활은 무엇입니까? 희망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확신과 선취적 자세입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죽음을 수락하고 현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껴안는 결단입니다. 대만의 개신교 신학자 송천성의 설명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바로 이 모순의 현실, 불의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가 긍정하고 수락하되 그 모순과 불의와는 계속 맞서 싸우는 행업과 결단입니다.

아침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 7장 14절 “보라,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메시아 희망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천사 가브리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잉태를 수락한 성모님의 결단을 묵상했습니다. 성탄 직전이라 이렇게 새로 태어날 아기가 주제어로 제시됐습니다. 아기의 탄생은 매우 기쁜 일이며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많은 이들의 반대를 받는 표징으로 그 어머니 마리아 마음은 칼로 찔리듯 큰 아픔을 겪게 됩니다. 이 현실은 신앙적 관점에서는 하늘의 뜻을 수락하는 일이며 개인적 관점에서는 참으로 고통의 길입니다.

오전 11시에는 사목연구원 이사회에 참석했습니다. 사제들 모두 매우 무겁고 침통한 표정으로 선거 결과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 중 한 사제는 “이민가야겠어”라고 불쑥 한 마디 했습니다. 저는 안중근 의사의 체험을 제시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이 바로 민주화와 통일을 새로 시작할 때임을 확인하고, 거짓 언론에 맞서야 한다는 말을 나눴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몹시 상심한 안중근 의사는 이주 계획을 세우고 상해를 방문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성당에서 기도하고 나오다 프랑스 선교사 르각 신부님을 만납니다. 그 사제에게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노골화된 침략과 이에 맞서기 위한 상해 이주 계획을 말씀드렸습니다. 안 의사의 말을 듣고 그 분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처럼 조선인 이천만이 조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주한다면 조선 땅은 누가 지키겠는가!” 그리고 독일의 공격 직전 알사스 지역의 프랑스 사람들이 모두 이주해 독일이 전쟁도 없이 그 땅을 차지한 예를 들면서 고국에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고 단합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그 사제 말에 부끄러운 마음과 감동을 받고 돌아와 돌아가신 아버님의 장례를 치르고 진남포로 이주해 돈의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고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후세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렇게 하루를 지내고 21일 금요일 낮에는 원탁 모임에 갔습니다. 역시 분위기가 무거웠습니다. 참석자 각자의 생각과 시대적 한계에 대한 체험을 나눴습니다. 실망과 분노 그리고 아쉬움이 교차하면서 그래도 ‘희망 2013’의 뜻을 되새기며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1470여만 명의 뜻을 모으는 일에 충실하자고 다짐했습니다. 물론 ‘2013’의 큰 꿈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우리가 주장한 내용의 일부가 정치 현실에 반영되었으니 이제는 후보자가 공약한 내용을 잘 검토하여 체계적으로 실천하도록 감시하자는 의견도 제시됐습니다.

21일 저녁 5시에는 민족21 정용일 국장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대선에 대해 외국 언론은 “독재자의 딸이 인권변호사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보도를 들으면서 저는 너무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십자가신학, 아우슈비츠 비극, 제 자신 감옥 체험을 떠올리며 죽음과 비극과 아픔을 넘어, 더 큰 희망을 일구어 내야할 소명과 책임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제가 해야 할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오후 6시 30분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송년보고회에 참석했습니다. 역시 무거운 저녁 분위기였습니다. 예년에 비해 참석자도 적었습니다. 저는 건배사에서 거짓 정보와 왜곡보도로 국민의 식별력을 흐리게 한 조선일보와 종편, KBS, MBC 등을 타파하고, 반민족‧친일‧독재 후신이며 분단을 획책하는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을 이겨 내자고 크게 세 번 외치고 건배했습니다.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함께 응답했습니다. 선거결과는 조선일보와 종편 등 거짓 언론 때문에 왜곡됐습니다. 우리가 맞서 싸울 대상은 새누리당에 앞서 진실과 역사를 왜곡하는 조선일보 등 거짓 언론과 방송입니다. <미디어오늘>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2일 토요일 오전과 오후 저는 성탄을 앞두고 신자들과 함께 참회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체험 나누기 과정에서 모두들 아픈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그 중 한분은 대선 결과를 지켜보면서 “인혁당 가족들과 민청학련 관계자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고 토로했습니다. 12월 25일 낮 성탄 미사를 위해 저는 대한문으로 달려갔습니다. 추운 겨울 길거리 한복판에서 우리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 아기와 갈바리아 언덕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타살당한 청년 예수’를 묵상하며 신앙의 근본과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27일 저녁에는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월례 모임 참석 차 성공회 성당 강의실에 갔습니다. 이 날 원로교수 몇 분이 전주를 중심으로 전국에 일고 있는 12·19 대통령선거 개표 부정에 관한 서명운동과 선관위 노조위원장의 유튜브 동영상 내용을 기초로 개표에 대한 근원적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함세웅 신부
©연합뉴스
 

28일 저녁 7시에는 시청 다목적홀, ‘김근태 1주기 추모 문화제’에 참석해 “2012년을 점령하라”는 김근태의 유언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모두들 부끄러운 마음으로 반성하며 용서를 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12년은 물리적인 한 해가 아닌 종말론적, 실존적 의미로 해석하며 2013년, 2014년, 2015년 늘 다가오는 새해에 최선을 다하라는 명으로 알아듣고 김근태의 뜻을 계속 실천하자고 다짐했습니다. 29일 오전 10시 창동성당에서 김근태 1주기 추모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올곧고 소박하고 겸손한 김근태님의 뜻을 기리면서 미사와 함께 추모식을 거행했습니다. 특히 이날 미사에는 많은 국회의원들이 참석했는데 무엇보다 4월과 12월 두 차례 선거를 통해 김근태 의장의 유언을 실현하지 못한 점에 대해 크게 반성하고 특히 민주당의 반성과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31일 오전 감사미사를 봉헌하고 오후 6시 반에는 대한문으로 달려가 쌍용자동차, 강정마을의 아픔과 현대자동차 그리고 선거 이후 돌아가신 다섯 분의 형제들을 기억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동지들과 함께 송년미사를 봉헌하고 새해를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매일 미사와 행사에 참여하면서 선거 결과의 아픔을 이겨내고 창조적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새해 아침입니다. 뱀의 해입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하라”(마태오 복음 10,16)는 말씀을 간직하며 2013년의 투신을 다짐하고 조선일보 등 거짓언론과 방송 타파 실천을 다짐하며 더 아름다운 미래를 꿈꿉니다. “자! 일어나 갑시다”(요한 14, 31)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