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은지원이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와 친척관계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 사실은 지금껏 은지원에게 부담이 아니었다. 은지원은 KBS 2TV <1박 2일> 등 과거 자신이 출연했던 프로그램에서 박 후보와의 관계를 개그 소재로 이용했다. 은지원은 넘보기 힘든 정치권 인맥을 갖고 있지만 이에 개의치 않는다는 이미지로 인기를 높였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의 선거 지지유세를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둘의 관계는 정치가 된다. 연예인으로선 시청층에 타격을 입는 셈이다. 박 후보를 지지하지 않지만 은지원은 좋아하던 시청자들이 은지원에게 등을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를 상대하는 연예인에게 정치판은 일종의 금기대상이다.

그럼에도 은지원은 지난 6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경기도 안산시 유세차량에 올랐다. 그는 “쑥스럽지만 인사드립니다. 날씨 추운데 오셔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믿어주시고 많이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 지금껏 지지유세에 나서지 않던 그가 나서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공교롭게도 6일은 선관위 주최의 대선후보 TV토론(4일)이 있었던 직후였다.

은지원 소속사는 지난 6일 언론을 통해 “은지원이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박근혜 대선후보와 엮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박 후보에게도 이번 대선은 매우 중요하고 큰일”이라며 “가족으로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가족회의 끝에 지원유세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컴백을 앞둔 상황에 지속적인 지원 유세는 어려울 것”이라 밝혔다.

6일 지원유세는 어떤 국면의 돌파를 위해 일시적인 유세를 결정하는 급작스런 가족회의 결과였다는 이야기다. 예정에도 없던 지원유세를 해야 했던 계기를 찾자면 TV토론밖에 없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게 “반드시 박 후보를 떨어뜨리겠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행각과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받은 6억 원 등을 언급하며 맹공을 펼쳤다.

때문에 박 후보에겐 ‘이정희와 박근혜’라는 이야깃거리 대신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유권자에게 시급히 던져줄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언론이 여권 편향적이라 해도 TV토론 날 것을 본 유권자들이 스스로 언론이 되어 구전을 통해 전해줄 이야기는 부동층을 움직일 만큼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은지원의 등장으로 6일 포털 검색어는 ‘은지원과 박근혜’였다.

은지원은 유세현장에서 박근혜 후보의 오른쪽 뒤편에 서서 발언이 끝날 때마다 열심히 박수쳤다. 하지만 박 후보가 발언할 때는 고개를 여기저기 돌리며 내내 안절부절 했다. 같은 유세 현장에서 안정적으로 박 후보를 지키던 가수 설운도와는 대조적이었다. 갑작스런 지원유세 배경을 따져보면 은지원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다.

박근혜 후보와 은지원은 5촌 사촌관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큰누나인 박귀희씨가 은지원의 조부인 은용표씨와 결혼했으며, 은용표씨의 셋째아들 은희만씨의 셋째 아들이 은지원이다. 은지원의 부친 은희만씨는 박정희 대통령 생존 당시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요즘 세대 입장에서 보면 둘 사이는 먼 친척이다. 박 후보와 은지원은 사석에서 과연 몇 번이나 살갑게 마주했을까.

그 동안 둘 사이의 스캔들이 없었던 것도 둘이 만날 일이 거의 없어서였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는 선거판이 급해지자 조카가 갖고 있는 이미지를 긴급하게 투여했다. <1박 2일>에서 쌓은 대중적 친근함과 <응답하라 1997>, <세 얼간이> 등에서 얻은 젊고 도전적인 이미지를 썼다. 그리고 YTN을 비롯한 방송사는 당일 뉴스에서 은지원을 상당시간 노출시켰다.

덕분에 ‘박근혜 옆 이정희’는 잠시 잊혀졌다. 은지원이 이야깃거리로 올랐다. 하지만 이 날의 동행으로 은지원이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은지원은 설운도, 선우용녀, 이용식 등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다른 연예인들처럼 하나의 이미지로 소비됐다. 그리고 그 덕에 원치 않았을 원색적 비난도 받았다. 이것이 5촌 고모를 대통령 후보로 둔 은지원이 약간 측은했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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