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1985>는 트라우마를 남긴다. 1987년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았던 김기식씨는 “문을 열고 철길에 던지면 넌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협박을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역사적 맥락 없이 시각으로만 본다면 이 영화는 호러나 고어물에 가깝다. 알몸으로 벗긴 뒤 칠성판에 묶어놓고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하는 장면은 활자로는 설명이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역을 맡은 배우 이경영은 지난 14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영화에서) 사실에 가까운 고문을 했다. 다시는 이 땅에서 이 같은 영화가 제작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할 정도였다.

더욱이 영화는 실제 존재했던 일을 재연했다. 우리는 영화에 몰입할수록 지하철을 타며 지나쳤던 남영동의 모습, 민주화운동가이자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TV속에 등장했던 한 인물의 얼굴을 떠올려야 한다. 픽션의 잔인함과 논픽션의 잔인함은 결이 다르다.

‘김 선생’은 고문기구 칠성판에 몸을 부르르 떨며 거짓자백을 한다. “나는 빨갱이고 폭력혁명을 기도했으며 배후세력은 함세웅 신부다!” 관객은 김 선생의 고문이 멈추길 간절히 바라지만 동시에 그가 ‘신념’을 지키길 원하며 자기고민에 빠진다.

트라우마는 잔인한 고문 장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현실을 사는 우리의 갈등과 김근태가 겪는 갈등이 맞닿으며 발생한다. 남영동에 갇힌 김근태를 보며 공감하고 아파하는 순간, 우리는 지금껏 두려워 침묵했던 많은 권력에 대해서 입을 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고문은 구전이 되어 공포를 심고, 이탈리아 혁명가 그람시가 말했던 ‘자발적 동의’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전체주의는 개인을 철저히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군부독재시절 스스로를 희생시키며 생존했다. 물리적 고통보다 엄습하는 두려움은 ‘남영동’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고, 국민들에게 ‘남영동’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상징적 공포장치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며 프로야구가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호황이었다는 1980년 대 중반의 컬러TV시대에 남영동 고문실과 이근안의 존재는 비현실성을 부여하지만 동시에 기시감을 준다. 인식하고 있었지만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또 다른 세상의 반쪽이다. 그 세상엔 우리의 선배와 후배, 직장 동료들이 살고 있다.

고문관들이 정신병자나 ‘절대 악’이 아닌 모습에선 무력감과 자괴감이 든다. 고문관의 모습은 세계 2차 대전 시기 유대인을 거리낌 없이 학살했던 나치 관료 아이히만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히틀러의 지시를 받아 유대인을 ‘효과적으로’ 학살했다.

독일 패망 후 체포된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고, 이는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줬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에 주목하며 “무사유(생각하지 않음)가 아이히만의 죄”라고 지적했다.

<남영동 1985>를 제작한 아우라픽처스 정상민 대표가 “영화는 과거의 고문을 자행했던 특정 정치집단을 비난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다. 과거의 과오에 대해 특정 세력이 잘못했다, 나는 잘못이 없다고 누구도 얘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아렌트가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우리는 언제든지 국가폭력의 날 것을 목격한 뒤 갈등에 빠질 수도 있다. 예측 가능한 갈등의 결과에 관객들은 트라우마를 겪는다. 결국 이 사회는, 1985년의 그 때와 별 반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사회의 야만성은 단순히 총·칼과 같은 물리적 폭력에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계급적 모순과 거대 자본의 폭력은 남영동 대공분실처럼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악몽이다.

시민은 평범하다. 임금 노동 외에는 생존을 위해 별반 행위를 하지 않는다. 아렌트가 말했던 ‘생각하지 않음’은 언젠가 사회적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얼마만큼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어쩌면 권력자만 교체되고 권력 자체의 속성은 변하지 않을 대통령 선거를 두고 누가 당선되면 세상이 바뀔 것처럼 쉽게 안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영화 속 김근태의 독백은 쓸쓸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